과거와 현재의 공존, 순천 낙안읍성

2022. 12. 4. 05:49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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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읍성"

[사적 순천 낙안읍성 (順天 樂安邑城) Naganeupseong Walled Town, Suncheon]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영문 설명]

The walled town was built with soil to protect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in Joseon, considering the past frequent aggressions in the end of Goryeo.

It was built in 1397, the 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in Joseon, for the first time. Looking at the Sejongsillok (Annals of King Sejong) after that time, the fortress has been rebuilt and expanded over many years since 1423. Most types of fortress are rectangular and are about 1,410m long. There are gates connected with a wide road within the fortress in the east-south and west-south, and part of the fortress protrudes to protect effectively against the attack of the enemy. Since the village within the fortress has traditional aspects preserved, one can have a glimpse of the lifestyle and culture at that time.

Naganeupseong is one of the remaining well-maintained styles of fortresses that realistically show the style in the early Joseon period.

출처:문화재청


"낙안읍성 서문 장승과 금전산"


[국가민속문화재 순천 낙안읍성 마루방집 (順天 樂安邑城 마루방집) House with Wooden Floored Room in Naganeupseong, Suncheon]

낙안성의 동서를 잇는 큰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초가집이다. 반듯하고 넓은 대지에 자리한 이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깊숙한 자리에 안채가 있고, 대문 바로 옆 서쪽에 화장실이 있다.

안채는 서쪽부터 부엌·안방·마루·작은방으로 배열되어 있고 부엌과 안방의 사이에 흙으로 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간쯤에는 조왕신을 모시던 자리와 광솔불을 켜던 선반을 설치한 자리가 있다. 앞쪽벽의 윗부분에는 빛이 통할 수 있는 봉창들이 있어 부엌이 좀 밝다.

안방에는 앉았을 때 눈높이에 맞는 창문이 달려있어 채광과 함께 통풍도 되고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마루는 작은방을 넓게하기 위해 좁게 만들었다. 작은방 앞에는 'ㄱ'자로 꺾인 돌담을 쌓아 흙바닥의 돌담 안쪽을 헛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장독대는 부엌 앞쪽으로 담을 의지하여 아담하게 꾸몄다.

특색있는 평면구조와 일부 건축구조에서 특수한 면을 보이고 있어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있다.

출처:문화재청


"심안모옥은 성정채갱향"

마음이 평안하면 초가집도 안온하고

성품이 안정되어 있으면 나물국도 향기로우니라


"우리 문화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수선화와 초가집"


[낙민루]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6.25 전쟁 중(1951)에 소실되었다가, 1984년부터 시작된 낙안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건립되었다.

낙민루는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 건물로서, 1층은 12개의 사각형 돌기둥을 세워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2층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서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 또한 중앙에는 낙민고를 설치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내부 본부에는 모로단청 하였다. 현판은 남송 신계우 전 승주군수 필체로 복원하였다. 더불어, 낙민루 앞뜰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나주부사가 각 군을 순회할 때 아홉 번째로 들러 쉬며 머물렀다 하여 구정뜰 이라고 한다.


"낙안읍성 동헌과 금전산"


"낙안읍성 동헌 사무당"


"천하 명당터"

낙안읍성 동헌내 금전산이 바라 보이는 곳으로 천하 명당터로 불린다.


"낙안읍성 내아"


"낙안읍성 객사 홍살문"


[낙안읍성 객사]

객사(낙안지관)는 왕명으로 오는 사신들과 고을을 찾아오는 기타 관리나 외빈들이 머물다 갔던 곳으로, 고을의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로 동헌보다 격이 높아 낙안읍성 내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낙안객사는 1450년(세종32년)에 군수 이인이 건립한 후 1631년(인조9년)과 1857년(철종8년)에 중수하였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남아있었다고 하며,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2년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객사는 동쪽 방은 문관(동반)이 서쪽 방은 무관(서반)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객사 중앙 마루에서는 궐패와 전패를 모시거나 고을의 대소사시 향궐망배례를 행하던 곳이다. 건물형태는 정면 7칸, 측면3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날개는 팔작지붕이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임경업장군비각 (林慶業將軍碑閣)]

낙안읍성 내의 객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가에 있는 한채의 비각과 그 안에 서 있는 비로, 임경업 장군의 어진 다스림을 기리고 있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시대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 4년(1626) 이곳 전라도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해왔다. 인조 6년(1628) 3월 서울지역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지역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를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 신봉하기도 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면 주인들에 의한 큰 제사가 행하여 지고 있다.

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옆에서보아 여덟 팔(八)자의 선을 그리는 팔작지붕을 얹었다. 앞면과 옆면의 기둥사이에는 붉은 막대들을 세워놓았고, 뒷면은 길다란 널판을 끼워 벽을 이루게 하였다. 비각 앞에는 ‘전군수임장군비각 영건표적비’가 자리하고 있고, 비각 앞면 윗부분에 ‘차임장군비각판상운(1893, 신병우)’과 ‘비각문관중건기(1952, 김상언)’이라 새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 24년(1748)에 비각을 세운 후 1893년과 1952년에 각각 보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이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고, 귀가 표현되어 있으며 코는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등은 볼록해져 있으며, 중앙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두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몸 앞면 중앙에는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는 비의 명칭을 세로로 새겨 놓았고, 왼쪽 아래부분에 건립연대를 적어놓았다. 이 기록을 통해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던 인조 6년(1628)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임경업장군비각]

이곳은 1628년(인조 6)에 군수 임경업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각과 그 안에 서 있는 비로 구성되어 있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시대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 4년(1626) 이곳 전라도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해왔다. 인조 6년(1628) 3월 내직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지역에는 임경업 군수를 신봉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면 주민들에 의해 큰 제례가 이어지고 있다. 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앞면과 옆면의 기둥사이에는 붉은 막대들을 세워 놓았고, 뒷면은 길다른 널판을 끼워 벽을 이루게 하였다. 비각 앞면에는 '전군수임장군비각 영건표적비' 가, 비각 앞면 윗부분에 '차임장군비각판상운(1893, 신병우)' 과 '비각문관중건기(1952, 김상언)' 이라 새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 24년(1748)에 비각을 세운 후 1893년과 1952년에 각각 보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을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신 앞면 중앙에는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는 비의 명칭을 세로로 새겨 놓았고, 왼쪽 아래부분에 건립연대를 적어놓았다. 이 기록을 통해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치고 낙안읍성을 떠나던 인조 6년(1628)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동문에서 바라본 성곽과 금전산"


[전라남도 기념물 낙안읍성노거수 (樂安邑城內老巨樹)]

승주 낙안성내 노거수들은 낙안읍성 성벽과 성안에 심어진 나무들로 은행나무 3그루, 팽나무 6그루, 푸조나무 3그루, 개서어나무 2그루, 느티나무 1그루 등 모두 15그루가 있다. 

객사 뒷편의 길이 약 150m에 이르는 성벽에는 팽나무 5그루, 푸조나무 2그루, 개서어나무 2그루, 느티나무 1그루 모두 10그루의 나무가 있다. 객사 동쪽에는 팽나무 1그루가 있고, 객사 뒷편 마당에는 큰 푸조나무 1그루가 있다.

낙안읍성 동문에서 남서쪽 50m 거리와 남내리 객사 남쪽 110m 거리, 그리고 객사 남서쪽 130m 거리에 각각 은행나무가 한그루씩 심어져 있다. 나무의 크기는 다양한 편이며 나이를 200년 이상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둘레가 3m이상 되는 것으로 팽나무 5그루, 은행나무 2그루, 느티나무 1그루, 푸조나무 2그루 등이며, 300년 이상은 푸조나무 1그루, 팽나무 1그루, 은행나무 1그루 정도로 추측된다. 낙안성이 세워진 것은 인조 4년(1626)인데, 300년 이상 된 나무들은 이때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승주 낙안성의 노거수는 오늘날 낙안성과 그 주변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고 있으며 나무의 그늘은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나무가 오래되고 생물학적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어 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초가집과 장독대"


"낙안읍성 전경"


"낙안읍성 남문"


[국가민속문화재 순천 낙안읍성 주막집 (順天 樂安邑城 酒幕집) Old Tavern House in Naganeupseong, Suncheon]

낙안성 남문의 가운데로 뻗어 있는 큰 길에 접해있는 첫번째 초가집이다. 담장을 쌓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대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田'자 모양의 집이 자리잡고 있다. 낙안성 안의 유일한 '田'자형 집인데, 땅이 좁아서 택한 평면이라 여겨진다.

방 2개, 점포, 부엌으로 구성이 된 이 집은 대문간의 첫칸이 방이고 다음칸이 부엌이다. 방의 뒷쪽으로는 점포로 사용되던 마루방이 있고 그 옆에 안방이 있다. 방의 앞쪽으로는 각각 툇마루를 달아 개방하였다. 벽은 흙벽인데 부엌의 옆 벽면은 돌로 쌓았다. 벽의 윗부분에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긴 판자를 매어놓아 작은집에서 쓸모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사적 순천 낙안읍성]

이 땅에서 벌어진 숱한 전쟁도 이곳만은 피해 갔던 듯싶다. 

순천 도심에서 서쪽으로 22km 떨어진 곳에 이렇게 소박한 조선시대의 마을이 원형 그대로 보전돼 있을 줄이야. 

관광객들이 발을 들이는 순간 너나없이 감탄을 자아내는 사적302호 낙안읍성은 1626년(인조 4년)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석성을 쌓은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왜구가 넘볼 수 없도록 흙 대신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견고한 성곽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218채의 초가집들, 성안에 있는 낙민루, 동헌, 객사, 큰샘 등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 마을 전체가 전통 문화를 오롯이 느끼게 하는 민속촌이다. 

지금도 성 안팎에서 98 세대, 228명의 주민이 아궁이에 불을 떼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출처:순천시청


[사적 순천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금전산의 남쪽 기슭 아래 펼쳐진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길다란 장방형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성 전체의 길이는 1,410m, 높이는 4m이며, 동·서·남 세 곳에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된 문이 있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이 네 군데 돌출해 있다. 직경이 1~2m 정도 되는 큼직한 자연석으로 성곽을 쌓았는데, 아래쪽은 큰 돌을 쌓으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석재를 썼다.

현재 읍성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동문에서 남문 사이의 성곽이 가장 온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남해 순천만을 통해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므로 특히 왜구가 들어오는 남쪽 부분이 튼튼하여 지금까지도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의 북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것은 왜적이 들어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약하게 지어졌으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순사건 때 산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마을로 넘나들면서 파괴된 것이라 한다.

낙안읍성을 돌아볼 때는 동문으로 들어가 문 위의 낙풍루(樂豊樓)로 올라가서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돈 뒤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특히 남문을 지나 성의 북쪽으로 돌계단이 이어지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정취가 가장 좋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을 한채 한채 따져보다 보면 구수한 맛이 덜하게 되고, 또 마을 안의 민속주점들 탓에 한껏 마음과 시선을 주기 힘든데, 이곳에 올라보면 이런 단점이 묻히고 마을 전체의 푸근한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자리에서는 낙안읍성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매우 아름답게 조망된다. 드넓은 낙안벌 너머로 북쪽은 금전산, 동쪽은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은 백이산, 남쪽은 백이산 줄기에서 떨어진 옥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땅은 넓고 백성이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뻗쳐 있어 남방의 형승지로는 이곳이 제일이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칭찬한 낙안 풍광 그대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우물.큰샘]

이 우물은 옛날 낙안군수(고을 수령)님이 드셨다 하여 큰샘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이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하였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하였는데 이는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게 되면 배 밑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낙안 고을이 쇠한다고 믿었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한 것은 배 안에 고인 물을 퍼내어야만 배가 안전하여 낙안고을이 홍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듯 낮은 곳에서 나는 우물인데도 가뭄 때나 우기 철이나 별 차이 없이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본래의 그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한 중앙에 위치하여 읍성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때로는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물을 마시면 성품이 착해져 미인이 된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가야금 명창의 최고봉 오태석 명인 생가]

오태석 선생(1895. 7. 29. ~ 1953, 9.7.)은 낙안읍성 내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398번지에서 조선 말기 판소리 고수,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대명인인 오수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서전에서 순천시 낙안면에서 출생하였다고 한 송만갑 국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박덕기 선생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운 오태석 명인은 판소리, 창극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가야금 병창을 국악의 한 장르로 개척한 명인으로 가야금 병창의 최고봉으로 추앙받고 있다. 오태석 선생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가야금 병창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향사 박귀희, 경북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던 장월중선 등이 있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안숙선, 강정숙 등이 서울에서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오태석 평인의 제자인 박귀희 선생으로부터 가야금병창을 배운 이영애가 낙안읍성에서 오태석 명인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석구와 순천읍성 동문"


[석구]

예로부터 개는 집을 지키고 잡귀, 잡신을 물리치는 영물로 여겨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개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일본의 경우는 새로 짓는 신사나 절에도 정문 밖에 돌로 만든 개 모형을 세우고, 고마이누(고려개)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려가 일본에 불법을 전하면서 함께 보급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 석구상은 이를 뒷받침하여 주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여겨진다.

이곳 낙안읍성 동문 밖 평석교 앞에는 세 개의 석구상이 보존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 마리는 오봉산이 험준하고 산세가 강하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고자 세웠으며, 또 한 마리는 제석산과 거선봉의 사나운 기운을, 북쪽의 한 마리는 금전산, 조산, 우산, 고동산의 위세를 누루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정유재란(1597) 당시 지금의 오봉산(옛 멸악산) 아래서 많은 왜군이 죽어 갔다고 하는데, 그 원귀가 낙안읍성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동문입구에 세웠다고도 한다.


"낙안읍성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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