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상징, 유달산(儒達山)

2021. 4. 14. 05:20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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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노적봉(해발 60m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 봉우리에는 1597년 10월부터 1598년 2월까지 목포에 머물고 계시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슬기가 괴인 곳이다. 충무공께서는 적은 군세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를 짚마름으로 덮어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봉처럼 꾸며서 우리의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속여 왜군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이 봉우리의 이름을 노적봉으로 부르게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상(목포는 예로부터 우리 바다를 지키는 조선수군의 거점으로, 고하도와 노적봉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하도는 1597년 정유재란 때 106일(1597.10.29. ~ 1598.2.16.) 동안 머물면서 호남의 민초들과 함께 수군을 재건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곳이다. 노적봉은 이순신장군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보이게 하여 왜적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이러한 인연으로 고하도에는 1722년 이충무공기념비가 세워졌고, 매년 이충무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의 동상은 호국의 도시 목포에 담긴 이충무공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4년에 세웠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1916~1965)이 부른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을 기념하기 위해 목포에서 음반판매업을 하던 시민 박오주의 출연금을 토대로 1969년 세운 노래비이다. 1935년 발표된 목포의 눈물에는 “삼백연 원안풍”이라는 노랫말이 등장하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변경한 노랫말로 원래는 "삼백년 원한품은”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삼백년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시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목포 사람들의 항일의식을 엿볼 수 있다.)


목포의 오포대(오포(午炮)는 오정포(午正砲)라고도 하는데 1908년(융희 2년) 4월 1일 당시 일본통감부가 한국과 일본의 1시간 시차를 무시하고 오전 11시에 일본 시간 정오 12시에 맞춰 정오로 정하고 포를 쏘아 알린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목포의 오포(午炮)는 1909년 4월에 개시되었다. 최초의 오포(午炮)는 조선식 선입포[화약과 포탄을 앞에서 넣고 심지를 꽃은 다음 불을 붙여 발사하는 식]로 경기도 광주로부터 이송해다가 측후소 바로 위 각국 거류지계 표석 근처에서 제일성을 울렸다. 이 포는 조선조 현종 10년 서기 1669년에 제조된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1회 발사 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며, 발포할 때마다 뒤로 밀려가는 구식이었기 때문에 1913년 8월 일본 오사카 포병공장에서 당시 가격 160원하는 야포를 구입하여 후에 사이렌이 그 역할을 대신할 때까지 사용했으며, 그 전에 있었던 조선식 대포는 당시 동명동에 있던 송도신사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말기에 일본이 공출로 거둬가 버린 것을 1988년 12월 26일 현재 자리에 복원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1986년 11월 유달산 오포대를 지방 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하였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전경"


"유달산 해상케이블카"


"목포의 상징"

유달산(목포의 상징으로 높이는 228.3m,백두대간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이다. 유달산(儒達山)의 이름은 옛 문헌에 대부분 놋쇠 유(鍮)로 등장하지만 구한말에 선비 유(儒)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산 정상 부근에 봉수대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린 노적봉 등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바닷가에 위치하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다 극락제계로 가게 되면 3마리의 학이나 코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다고 용궁으로 가게 되면 거북섬으로 가 거북이 등에 실려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일등바위에서 바라본 다도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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