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흥인지문&한양도성 순성길 낙산구간

2021. 11. 9. 08:28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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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서울 흥인지문 (서울 興仁之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문 설명]

ㅉSeoul fortress wall was built to protect Joseon’s capital, Hanseong, where a number of important national institutions were situated. Of the eight gates of the fortress wall, Heunginjimun Gate, located to the east of Seoul (also known as Dongdaemun Gate), was originally built in 1398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repaired in 1453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Danjong), and acquired its current appearance as a result of restoration work carried out in 1869 (the 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The gate is a two-story building exhibiting the characteristic construction style of the late Joseon period. It measures 5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at the front and 2 kan at the sides, has a hipped-and-gable roof, and resembles a trapezoid when viewed from the front. The eaves of the roof are supported by a bracket system consisting of thin weak brackets with excessive decoration, placed on and between the pillars.

Heunginjimun Gate is the only gate of the wall to have a semi-circular barbican built both for defensive and offensive purposes.

출처:문화재청


흥인지문공원 한양도성 순성길 성곽( 두 개의 구간마다 판사(判事)를 두고 그 아래 직급에 따라 12명의 관원을 임명해 공사를 감독하였고, 한 구역은 다시 6등분해 견고하게 축성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 사후에 책임을 묻기 위하여 공사 구역마다 책임자의 성명이나 자호 따위를 새겼는데, 지금도 당시의 석축이 남아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서울 흥인지문]

도성의 동쪽 관문인 흥인문(興仁門)은 우리가 흔히 동대문이라 부르는 문이다. 편액에는 ‘興仁之門’이라 씌어 있는데 철종대까지의 기록에는 이와 같이 부른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종 때 개축하면서 그렇게 바꾼 게 아닌가 한다. 여느 도성 문과 달리 네 글자 이름을 붙인 이유는 풍수상 한양의 좌청룡이 되는 낙산의 지세가 약하여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전한다.

흥인문은 태조 5년 9월에 창건되었으며 단종 원년(1453)에 중수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다가 고종 6년(1869)에 전면 개축되어 지금에 이른다. 흥인문은 도성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다. 옹성은 태조 때 흥인문을 건립하면서 동시에 축조하였으며, 고종대에 전면 개축할 때 다시 쌓았다. 유독 흥인문에만 옹성을 쌓은 이유는 지형이 낮고 평탄해 방어에 부적당한 이곳의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보완하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옹성은 문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다가 북쪽의 일부를 터놓은 모양이다. 옹성 윗면에는 안팎으로 여장을 쌓고 총안(銃眼)을 내어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한양도성 순성길 흥인지문발 낙산구간 방향


교회, 나무 밑 기도하시는 남자분 


이화동벽화마을


한양도성 순성길 낙산구간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전경


흥인지문, 동대문디지털프라자 방향 전경


한양도성 순성길 낙산공원과 서울시내 전경


낙산공원 정차 중인 03번 버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전경


[사적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북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영문 설명]

The capital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anyang (present-day Seoul), was protected by fortress walls whose construction was begun just after King Taejo (r. 1392-1398), the founder of the dynasty, completed the royal palace (Gyeongbokgung) and the royal ancestral shrine (Jongmyo). The construction of the walls and other related defensive facilities was supervised by a special government agency established in 1395, four years after the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acceded to the throne.

Hanyang City Wall had four main gates, Heunginjimun in the east, Donuimun in the west, Sungnyemun in the south and Sukjeongmun in the north, and four auxiliary gates, Honghwamun in the northeast, Gwanghuimun in the southeast, Changuimun in the northwest, and Sodeongmun in the southwest. The East Gate (Heunginjimun) had an extra defensive structure known as a barbican, whereas the North Gate (Sukjeongmun, or Sukcheongmun) lacked a tall gatehouse but had a postern called a “hidden entrance” (Ammun).

In 1422, King Sejong (r. 1418-1450) ordered large-scale repairs of the fortress walls, resulting in the replacement of all the earthen wall sections by stone walls and the renovation of all the offensive and defensive facilities. This was followed by another major renovation project conducted in 1704 at the order of King Sukjong (1674-1720). The renovation work involved the “modern” technique of piling up neatly hewn square stones to give the walls vertical faces. These and other renovations conducted in different periods each left distinctive marks on the walls due to the use of different techniques and stones of different shapes. The fortress suffered severe disruption during the early 20th century due to the implementation of an ill-conceived urban plan by the Japanese colonial rulers. Further disruptions followed in the wake of the turmoil caused by the Liberation in 1945 and the Korean War (1950-53).

Today, the original features of the fortress can be seen in the walls remaining in Samcheong-dong and Jangchung-dong, and in certain gatehouses such as Heunginjimun. Hanyang City Wall in Seoul is regarded as a tangible example of the patriotism of the Korean people in the Joseon Period and as a valuable part of Korea’s historic heritage, providing a wealth of information on wall-building techniques and other architectural elements developed in the period.

One of the four auxiliary gates of Hanyang City Wall, Gwanghuimun, was built in 1396, and has been known by other names such as Sugumun (“Water Gate”) and Namsomun (“Small South Gate”). It underwent major renovation work between 1711 and 1719, with its new name plaque hung in that year. The gate lost its pavilion-style structure and part of the battlement on the western wall during the Korean War, but these features were restored in 1976. The current gatehouse was moved slightly south of the original site due to the building of a new road.

This earthen fortification near the Hangang River was built during the early days of Baekje (18 B.C. - 660). The fortress wall was originally 4 km long, but about half of the wall was washed away in a flood in 1925, leaving a section of only 2.7 km. The fortress was built in an oval shape, and there is evidence that there were four gates on the east side. The wall, now covered with weeds, was built by pounding layers of sandy earth. 

Many artifacts were excavated from the site, including items of undecorated plain pottery, Silla-style earthenware, fishnet sinkers, spindle whorls and ceramic tile shards, which suggest that the area was inhabited even before the foundation of Baekje.

Opinions vary on the nature of the fortress, with some scholars believing that it was part of the walled city of Wiryeseong, the capital of Baekje in its earliest stage, and others insisting that it is just an ordinary fortress built for defense purposes. Many specialists consider the site to be related in some way to other Baekje remains in Seoul such as Mongchontoseong Fortress and the Seokchon-dong Tomb Complex.

출처:문화재청


한양도성 순성길 낙산구간 제2전망광장


한양도성 외부 순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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