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청주 중앙공원

2021. 8. 22. 06:04청주자랑 100가지/문화·휴양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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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역사의 현장 1번지"

[청주 중앙공원]

옛 병영이 있던 자리로 1908년 관찰사가 충주에서 옮겨오면서 도청으로 쓰였고, 1937년 도청을 새로 지어 옮기면서 공원이 되었다. 이곳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10호 망선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36호 조헌전장기적비가 있다. 도심 공원의 기능을 하고 있고 청주역사의 현장 1번지로 꼽힌다.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7

출처:청주시


"청주역사의 산증인, 중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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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망선루 (淸州 望仙樓)]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망선루]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娶景樓)라 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관아의 부속 누정(회의 및 연회 장소)으로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다.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 홍건족의 침입 때 왕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1922년 일제의 무덕전 신축으로 망선루가 헐리게 되자 청주청년회 회장이던 김태희를 중심으로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에 이건하였다. 이는 청주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다.

이전된 망선루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 상당 유치원 등 민족교육 운동과 한글 강습, 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세광중고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망선루의 노후로 붕괴위험이 날로 높아가자 청주시에서는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와 2000년 12월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출처:청주시청


"망선루와 척화비"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척화비 (淸州 斥和碑)]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며,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인데,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척화비]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인데 비의 윗부분이 깨어져 ‘양(洋)’ 자와 ‘즉(則)’ 자가 없어 졌다. 그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이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위치로 옮겼으며, 높이 108m, 폭 47m의 크기이다.

출처:청주시청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압각수 (淸州 鴨脚樹)]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둘레가 8m이다. 압각수란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주장과 나무 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을 비롯한 어진 신하 10여 명이 모함으로 청주 감옥에 갇혔다가 큰 홍수를 만났을 때 압각수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압각수는 이색 등과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며,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주의 상징적 존재, 압각수"


"청주의 상징적 존재, 압각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과 압각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淸州 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

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져 서원현감 이병정이 세운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는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호서읍지와 청주읍지를 보면 정곡루가 병영에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병영내에 누각은 통군루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와 ‘청주읍성도’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병영이나 수영(水營)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곽건축이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조선시대 청주읍성(淸州邑城) 안에 있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의 출입문이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청남도 해미현(海美縣, 현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에 있었다가 효종(孝宗)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겼다.

병마절도사(육군사령관)는 관찰사(도지사)가 겸직하거나, 따로 전임(專任)의 종2품(從二品)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곳에 전임의 절도사가 있고 충청도의 육군을 총괄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조선시대 후기 병영(兵營, 육군사령부)이나 수영(水營, 수군사령부)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樓門)으로 아래층의 중앙에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우물마루로 하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二翼工) 형식의 공포를 만든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이다.

이 건물은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西原縣監) 이병정(李秉鼎)이 창건한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 『호서읍지(湖西邑誌)』와 『청주읍지(淸州邑誌)』에 보면, ‘정곡루(正鵠樓)’가 병영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병영내에 누(樓)는 통군루(統軍樓)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忠淸兵營圖)’와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출처:청주시청


[청주 영규대사 전장기적비]

조선 선조때의 승려로서 의승을 이끌었던 기허당 영규대사(?~1592)의 전쟁터기적비이다. 영규대사는 의승 수백명을 이끌고 관군과 함께 왜구를 물리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는데 이는 육상에서의 최초의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이 비는 1974년 건립되었는데, 비의 제목은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전자이적비'이며, 비문은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김응현이 썼다.

비에는 영규대사가 임진왜란 때 8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의병과 더불어 1592년 8월 1일 청주성 탈환작전을 벌여 이틑날 성공하였고 그 뒤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기록되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 (淸州 趙憲 戰場記蹟碑)]

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자리하고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

이 비(碑)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청주성(淸州城)을 탈환한 조헌(朝憲)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조헌(1544~1592) 선생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字)는 여식(汝式), 호(號)는 중봉(重峯),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조헌 선생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국정을 바로잡는데 헌신하였고, 학문연구에 힘써 학자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靈圭大師)와 합세하여 1592년 음력 8월 2일 임진란 최초의 승전인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 후 영규대사와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 전사 하였다.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하나로 거명되는데, 매년 청주성 탈환일에 조헌, 영규대사, 박춘무 장군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중앙공원 기적비(紀蹟碑) 앞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 비는 숙종 36년(1710) 현재의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 때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230cm, 폭 84cm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출처:청주시청


[청주 서원향약비]

서원향약비 조선 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청주 목사로 재직 당시(1571, 선조4년) 제정한 서원향약을 기념하는 비다. 향약이란 지방 자체로 전통의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악한 것은 경계하는 등 오늘날 지방자치의 기초로 볼 수도 있다. 서원향약은 향약설립 초기에 향약의 기본으로 우리나라 향약의 표본이 되었다.

출처:청주시청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시민헌장, 청주시민의노래"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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