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보성향교

2021. 6. 8. 06:14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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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보성향교 (寶城鄕校)]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태조 6년(1397)에 지은 보성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까지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산양지』에 의하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구계동에서 현 위치로 옮겼다가 양청산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정유재란(1597)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순조 32년(1832)에 고쳤으며,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서재 등이 있어 배움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제사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내삼문을 경계로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명륜당은 원래 풍화루였으나 자리를 옮겨 명륜당으로 고쳐서 사용하고 있다. 외삼문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대부분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출처:문화재청


유림항일사적비(1921년 일제는 보성향교 문묘용 제주를 밀주로 규정, 봉인 압류했으며, 유림이 거세게 항의하자 70여명의 유림을 붙잡아 주세령 위반 혐의로 온갖 고문과 협박을 자행한 바 있다. 이후 주동자로 인정된 박남현 참판 외 9명을 장흥검사국이 구속하자 이에 반발한 청년 유림이 보성향교 교정에서 '전국유림궐기대회' 를 열어 주세령 반대, 일본인 관리 탄핵 총궐기를 촉구하는 '경고팔도향교격문'을 발표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구속자를 석방했으며, 박남현 등은 전국을 돌며 주세령 폐지 운동을 전개, 전국 향교에서는 관례대로 제주를 빚어 사용하게 됐다. 이 같은 문묘용 제주를 둘러싼 일제와 유림들의 대립 과정에서의 항일운동사가 잊혀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유림 및 유족(대표 박해철)들이 지난 1991년 '유림 항일 사적비’를 건립했다. - 출처:광주일보, 2013. 09. 30.)


은행나무와 벚나무 연리목(대성전 좌측 은행나무에 벚꽃이 하얗게 만개하였다. 마치 사람이 접목이라도 해 놓은 듯 벚나무가 은행나무 줄기의 일부로 자라고 있어 해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향교 관계자분 말씀으론 새나 동물이 물고 온 씨앗이나 변이 자라서 그런 게 아닌가 추측한다고 한다. 향교 답사 중 처음 보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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