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중심고을 충주, 관아공원

2021. 12. 3. 10:20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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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의 중앙, 관아공원"

충청도는 충주시와 청주시에서 딴 이름이다. 도(道)의 명칭을 정의하는 첫머리에 충주시가 위치한다. 그만큼 특별한 시간을 간직한 고장이 충주다. 충청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삼국시대부터 국토의 중앙에 자리한 위치 때문에 주변국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달리 중원 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삼국 중원의 시대를 지나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고려 때는 12목, 조선 시대에도 전국 20목의 하나였다

관아공원은 그 행정의 중심인 목 관아의 흔적이다. 시대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달라졌으리라 전제해도 공간의 상징은 한결같다. 관아는 읍성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읍성이 외관상 지역의 공공시설과 민가를 둘러싸는 보호 기능을 담당했고, 관아는 읍성의 행정이 원활히 기능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읍성과 관아는 하나로 이어진 유기적 시설물이다. 충주목사가 된 양, 관아와 읍성 일대를 순시하듯 돌아보는 건 충주와 첫 만남으로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충주읍성은 1277년(충렬왕 3) 처음 세워졌다. 둘레 680보 규모 석성으로 신방석(信枋石)에 화려한 연꽃무늬를, 자방에 태극무늬를 새겼다. 충주의 또 다른 이름인 예성(蘂城)이 여기에서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사라졌다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개축했다. 당시 충주목사 조병로가 고종의 명을 받아 10개월 만에 완성했다(1869년). 현재 관아공원에 있는 충주 축성사적비(충북유형문화재 68호)는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읍성의 둘레가 3550척이며, 두께는 25척, 높이는 20척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았다.

충주읍성은 1896년 다시 한 차례 불타는 피해를 당했다. 의병장 유인석이 이끈 충주성 전투에서 북문과 서문 수문청을 제외한 문과 수문청 등이 사라졌다. 당시 의병이 충주성을 장기간 점령한 사건은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에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가 발족, 충주읍성을 비롯한 각 지역의 읍성이 대부분 헐렸다. 이듬해에는 관찰부를 충주에서 철도로 접근이 쉬운 청주로 이전했다. 충청의 으뜸 도시로 자리매김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출처:충주시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충주 제금당 (忠州 製錦堂)]

조선 초기 관아건물로, 귀빈들을 맞이하던 영빈관으로도 사용했던 건물이다. 고종 7년(1870) 청령헌과 함께 불에 타버린 것을 같은 해 충주목사 조병로가 다시 지었다. 그동안 중원군수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1983년 원형을 살려 복원하였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으로 지었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오른쪽 2칸과 왼쪽 3칸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꾸몄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충주 청녕헌 (忠州 淸寧軒)]

동헌은 옛 관청인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건물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충주목 동헌으로, 당시 충주 목사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고종 7년(1870) 화재로 타버린 것을 같은 해 조병로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중원군 청사로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 자리를 옮기면서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 오른쪽 끝 1칸은 마루방, 대청 왼쪽 2칸은 온돌방, 왼쪽 끝 1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충주 축성사적비 (忠州 築城事蹟碑)]

사적비는 어떤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충주읍성을 수리·복원한 사실에 관해 적고 있다. 형태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몸 위에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에는 성의 수리에 관한 내용들을 새겨 넣었다. 비문에는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후 성과 군용기구 등을 수선하였고,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고종 6년(1869)에 전면적인 수리를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호수 수령 510년 충주관아 느티나무"


순교자 현양비(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천주교 순교자들의 현양비.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마다 충주부근의 천주교우들이 충주 동헌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므로, 이곳에 서린 순교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봉방동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신축부지)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01년의 신유박해때에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부자, 권아기련등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 현양 : 이름이 나 지위 등을 세상에 높이 드러냄
동헌 : 고을의 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
신유박해 : 조선시대 1801 (순조1)년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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