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중심도량, 용화사

2021. 11. 14. 08:24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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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중심도량, 용화사"

[청주 용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옛 절터인 이곳 용화사 부근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 판독결과 고려 후기에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思惱寺)라 밝혀짐으로써 용화사가 무구한 역사의 고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졌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고의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대에 미륵불 7본존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되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기도 하다가 이후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었으며,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용화사의 사적(193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무 6년(1902)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 (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 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이에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자면, 엄비는 1901년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천지가 요동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미륵은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큰절을 지어 우리를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이와 같은 사정을 청주군 지주에게 물어보라 말한 뒤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엄비는 고종에게 고하여 청주군 지주에게 어명을 내리고 조사하도록 하였다. 같은 시각 청주군 지주 이희복도 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다. 

3일 후 어명을 받은 이희복은 자신의 꿈이 엄비의 꿈과 일치한 것을 알고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사람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과연 그 곳에 가니 큰 늪이 있었으며, 이희복은 늪의 물을 퍼내고 보니 그 곳에 칠존의 석불이 묻혀있었다. 그 일이 어명과 부합되는 일이라 상고하니 엄비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뻐서 내탕금을 내려 그곳을 정비, 사찰을 짓고, 일곱 부처를 안치토록 했다. 

이에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이곳으로 옮기고 용화사(龍華寺)라 했다. 용화사라고 한 것은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설법도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화사의 창건 당시 사찰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칠성각 3칸, 설교전 15칸, 행랑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였다.이후 1935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김원근(金元根)거사가 당시 충북도청부속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매입, 이곳에 옮겨 법당 등으로 사용케 하였다. 6·25전쟁때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는 바람에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었다가 1972년 비구니 오동림(吳東林)과 신도들이 콘크리트 법당인 미륵보전을 새로 지어 안치했다. 

1976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후 조각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9년 4월10일 보물 제985호로 승격된 이들 석불상군은 월탄스님이 목조건물인 용화보전 불사를 1995년 준공해 이곳에 봉안해 오고 있으며 2007년5월 용화보전 보현보살 석불을 봉안 2007년 8월부터 극락전 신축 불사중에 있다. 

청주의 중심도량인 용화사는 수행과 포교의 구심점으로 신행단체를 재조직 개편하여 활성화하고 청주시민의 참여와 지역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데 노력하고 있으며, 도내 사찰 중 가장 먼저 충북불교대학을 개설, 동문회활성화 그 외 많은 산하단체를 설립함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확대와 더불어 도심속의 열린 도량으로 도약하고 있다.

출처:용화사


"청주 무심천변 용화사와 옛 사진"


"범종루"


"삼불전.용화보전"


"청주의 중심 도량, 용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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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 (淸州 龍華寺 石造佛像群)]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영문 설명]

According to the tablet on a ridge beam in the sanctum of Yonghwasa Temple, this temple was built in 1902. Legend has it that seven stone statues of Buddha appeared in the dream of Eombi, a consort of King Gojong, requesting her to build a house for them. She sent a person to find the stone statues at the stream northwest of Cheongju. Thus, Yonghwasa Temple was built, with the seven statues of Buddha enshrined in Mireukbojeon Hall of this temple.

These statues -- consisting of five Buddha statues and two Bodhisattva statues -- are all large, the tallest one being 550 cm and the shortest being 140 cm. Among them, the 3rd Buddha statue to the left has an extraordinary large usnisa (protrusion on the top of Buddha’s head) rising on the curled hair. The body wearing the sacerdotal robe draped over the shoulders is entirely voluminous, and the Chinese character “卍” is carved in relief on the chest. The fifth Buddha statue to the left has unique pleats, with the big image of arhat carved on the rear side. This arhat seems to have been carved in later times. The standing stone statue of Buddha, which had the head and two hands repaired later, has a large usnisa on the curled hair.

These seven Buddha statues are standing, with the seated statues of Buddha wearing sacerdotal robes draped over the shoulders. They are estimated to have been made in the Goryeo Period, judging from the face and detailed technique especially the pleats and hand shape.

출처:문화재청

약사여래부처, 미륵부처, 석가모니부처


석가모니부처 불상 뒤 유등보살(불상 뒷면에는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나한상이 양각되어 눈길을 끈다. 이 나한상은 나중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불상이 조성될 때 함께 새겨졌다는 주장도 있다. 나한상은 삭발머리에 원만한 얼굴이며 반달꼴 눈썹에 눈두덩은 부숭하고 눈은 반개하여 일직선이다. 콧망울 양쪽에서 입가로 주름이 깊게 패여 고행하는 수도자상으로 보이며 두 귀는 짧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왼손은 배 앞에 들어 향로를 받들었고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만 펴고 네 손가락을 꼬부려 향로 윗부분을 감쌌다. 굵다란 옷주름은 팔굽 아래로부터 좌우대칭을 이루며 흘러내렸고,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비교적 높게 새겨졌으나 점차 낮아져서 아래쪽은 선각에 그쳤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극락전"


"극락전 석조불상군(유마거사, 미상, 보현보살, 미륵보살)"


"극락전 옆 작은 연못과 우물"


"소전대와 헌식대"


헌식대(불공이나 제사가 끝나고 난 뒤 남은 음식들을 놓아두는 곳이다. 굶주린 이류중생(異類衆生)을 위한 보시이다.)


"헌식대 음식물을 먹는 비둘기"


"삼성각"


용화사 식사 공양(작년 식사 공양할 때 지하에 있던 공양간이 1층으로 옮겨졌다. 1년 정도 됐다고 한다. 좀 더 넓어지고 환해 보인다. 연세 계신 불자님들과 공양간 보살님들 모두 만족하시는듯하다. 벽에 걸린 오관게가 쓰인 그림이 보인다. 식사 공양 할 때마다 식자재와 음식을 만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우게 한다.)


용화사 식사 공양(공양간 식대에 깔끔하게 차려진 밑반찬과 국통이 보인다. 안쪽 조리 공간도 깨끗하고 환하다. 여보살님들 모습도 밝고 말씀도 상냥하게 하신다.

하얀 접시에 밑반찬을 골고루 빙 둘러 얹고 밥통 속 갓 지은 하얀 쌀밥도 중앙에 소복하게 담는다. 공양간 여보살님이 참 예쁘게 담는다고 한다. 이렇게 담는 사람 드물다고 한다. 사찰 답사하며 식사 공양 때 담던 버릇대로 한다고 말씀드린다.)


식사 공양(오관게 내용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감사의 마음으로 묵념한 후 눈을 뜬다. 김 나는 하얀 쌀밥을 중심으로 색색의 식자재로 만든 밑반찬이 곱다. 옆에 놓인 황금색 늙은 호박국이 방점을 찍는다.

눈맛으로 먼저 음미한 후 늙은 호박국을 한술 뜬다. 국물이 담백하고 은은하게 달다. 뭉근해진 늙은 호박은 치아에 닿기도 전에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다진 마늘처럼 보이는 하얀 무도 보드랍다. 간은 소금으로 살짝 했다. 늙은호박의 풍미를 더해준다.

따뜻한 쌀밥에 밑반찬을 곁들여 먹는다. 숙주나물은 아삭하게 씹히고 고사리나물은 졸깃하다. 새곰한 세발나물은 오독오독 씹히고 김치는 아삭하고 상큼하다. 무나물은 담박하고 부드러우며 꼬독꼬독 씹히는 오이지무침은 간간하고 씹을수록 맛이 깊다. 심심한 데친 얼갈이배추는 사근사근 씹히고 버섯과 배추, 브로콜리들도 각각의 식감과 맛을 낸다.

여러 식자재를 손질해 무치고, 볶고, 끓이고, 발효한 음식이다. 식자재 본연의 맛을 가리지 않게 간은 최소화하였다. 식자재의 귀중함, 만든이의 정성과 솜씨가 가득한 식사 공양이다.)


커피(식사 공양 후 커피를 마신다. 자원봉사 하시는 여보살님이 커피머신에 내린 따뜻한 커피를 푸른 잔에 담아 주신다. 원두커피 향이 물씬하다. 쓴맛이 부처님의 얼굴처럼 그윽하게 여운을 남긴다.)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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