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가장 큰 백제인 무덤군, 청주백제유물전시관

2021. 10. 8. 10:00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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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백제유물전시관]

사적 319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백제인의 무덤군에 세워진 전시관으로 청주신봉동백제고분군에 2001년 11월 건립되었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6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3기의 석실분과 300여기의 토광묘, 목관묘가 다양한 부장품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부터 무덤 떼의 규모나 다양한 매장 양식이 큰 관심을 끌었는데, 발견된 부장품들도 당시 백제의 대외관계와 지방통치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었다.

전시관은 신봉동백제고분군을 중심으로 인근의 송절동·봉명동·명암동·가경동 유적과 송대리·주성리 유적을 포함한 청주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고분축조과정과 기마·보명·농민상, 정북동토성 축조과정, 신봉동집터 모습 등 재현된 실물을 통해 당시 역사를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출처:청주시청


"청주백제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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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백제유물전시관"


"청주의 역사"


"청주읍성 성돌"


청주 한월동 가옥 망새기와(현재 청주지역에 남아있는 민가 중 가장 오래된 청주 한월동 가옥에서 출토된 망새기와로 2005년 가옥 보수 중에 확인되었다.

망새기와는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기와로 장식과 함께 상서로운 문양을 새기거나 제작연대를 표시하기도 한다.

한월동 가옥 망와에는 '강희임오(康熙壬午)'가 음각으로 새겨져있어, 기와의 제작 연대가 1702년(숙종 28년)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상량문에는 '숭정후사경신(崇禎後四庚申, 1860년)'이라 하여 기와의 연대와 차이를 보인다.


신라촌락문서 복제품, 통일신라(일본 정창원에서는 8~9세기경 서원경의 4개 마을을 대상으로 작성한 촌락문서가 발견되어 청주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일반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마을에 할당된 공유지를 공동 경작하였다. 또 국가에서는 3년 단위로 촌락의 둘레와 면적, 집 · 사람· 가축·토지·과일나무(뽕·잣·호도나무) 등의 변동 내역을 자세히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력동원을 위해 사람은 남녀와 연령별로 구분한 후 노비는 따로 파악하고, 집은 사람의 숫자를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누었다.)

'사량부속장지 일' 새김기와조각, 통일신라(685년(신문왕 5) 옛 백제 지역인 금강유역에 대한 감시와 통치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청주에 설치된 서원경과 관련된 기와조각으로 상당산성 남문 밖에서 출토되었다.

우암산 주변에서도 '탁부'가  발견되어 서원경도 왕경처럼 6부가 존재하는 행정시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를 반영하듯 청주에서는 운천동 사적비와 동종, 용암사불상· 성화동(농촌동) 금동불· 탑동석탑, 명암동· 용담동· 금천동 통일 신라무덤 등이 발견되고 있다.)


"백제의 발전, 연표"


"청주 고대 유적 분포도"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


"청주의 신라 무덤과 서원경"


"삼국시대 지배층의 무덤, 백제의 무덤"


"5세기 후반 청주 주변의 상황"


"백제 기마상, 보병상, 농민상"


"무덤 제작 과정"


널무덤 재현(신봉동 유적에서 가장 많이 발굴된 널무덤을 70%로 축소 재현하였다. 널무덤은 관보다 크게 구덩(움)을 파고 관을 넣은 다음 유물을 껴묻고 흙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돌방무덤(石室墳)이나 대형(大形) 널무덤에 비해 크기나 함께 묻힌 유물이 다소 빈약하여 낮은 신분의 인물이 묻힌 것으로 보여지나, 가장 널리 쓰인 보편적인 형태였다.

무덤에는 주검과 함께 많은 토기류와 둥근 고리 큰 칼· 작은 칼·도끼· 끌 낫· 화살촉, 목걸이 · 귀걸이 등의 장신구가 함께 묻힌 것이 일반적이다. 모형은 무덤이 만들어진 직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정북동 토성, 신봉동 움집터"


계량기로서의 손잡이잔(백제토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손잡이잔이다. 손잡이잔은 가야는 물론 신라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백제의 것이 두드러진다.

손잡이잔은 말머리 등 장식의 손잡이의 모양은 물론 토기 표면의 다양한 문양이 주목되어 왔다. 손잡이잔은 물과 같은 액체를 담는 용기로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 곡식 등의 양을 재는 계량기로서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손잡이잔의 용적(容積)은 약 2400cc를 1말(斗)로 하였고, 이것은 바리의 평균 용적인 600cc의 네배가 되는 양이다.)


"계량기로서의 손잡이잔"


"세발 접시,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


"청주 신봉동 고분군 새발무늬 항아리"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우리나라 가장 큰 백제인 무덤군"

[사적 청주 신봉동 고분군 (淸州 新鳳洞 古墳群)]

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북쪽 기슭의 동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고 있다.

107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06기는 흙을 판 후 무덤을 쓴 널무덤(토광묘)이고, 1기는 널방과 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무덤은 야산 전체에 걸쳐 분포하며, 봉분은 거의 깎여 나가 남아있지 않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가지 토기류·옥과 같은 장신구류·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같은 무기류·말갖춤(마구류)과 그 밖의 숟가락 등이 나왔다. 90-1호 널무덤에서는 갑옷이 출토되어 백제철갑의 실물을 볼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은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동안 만들어진 고분군으로, 대체로 4∼5세기경의 백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신봉동은 백제의 동쪽 변방지역으로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마구류·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돌방무덤은 서울지역의 백제 초의 것과 공주지역의 돌방무덤과 비교되는 자료로서 평가된다.

[영문 설명]

This area is widely located in a place sloping to the east of the western foot of Musimcheon Stream, traversing the downtown area of Cheongju from south-east to north-west. 

A total of 107 tombs were researched, 106 tombs of which are pit tombs made after digging the ground; the remaining tomb is a stone chamber tomb with tunnel entrances. In the case of pit tombs, they are scattered over the whole hilly area, and the original round tomb mound almost disappeared. The excavated relics are as follows: earthen wares of various shapes and uses, ornaments like jade, weapons such as iron knife, ax, horse gear, etc., and spoons. Pit Tomb No. 90-1 in particular had an armor excavated; it is drawing attention because it is possible to see real iron armor in the Age of Baekje. 

Ancient tombs in Sinbong-dong were not built in a specific age but formed during a considerable period, generally corresponding to the tomb group in the 4th ~ 5th-century Baekje. 

The remains of Sinbong-dong are located on the eastern border of Baekje, and many weapons and horse gear that are impossible to see at other remains were excavated; thus serving as great sources of data for the research on Baekje history. Stone chamber tombs are deemed valuable materials in the comparison with the tombs in Seoul in the early Baekje period and those in Gongju.

출처:문화재청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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