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의 읍성 탈환 승전지, 청주읍성

2021. 10. 9. 11:18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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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의 읍성 탈환 승전지"

[청주읍성]

읍성은 고을 주민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만든 성이다. 청주읍성 문에 대한 역사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 685년(신문왕 5) 3월 서원소경이 설치되고, 689년 윤 9월 26일 서원경성이 축조되었다고 한다. 930년(고려태조)에 나성이 축조되었고, 1362년(공민왕 11) 9월과 10월에 청주 내성 청주성에 큰 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성종실록」을 보면 1487년(성종 18) 2월부터 3년간 공사를 벌여 석축을 쌓았다고 한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승군이 성을 탈환하여 육전 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곳으로, 이후 청주의 전략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1651년(효종 2)에는 해미현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을 옮겨 왔으며, 인근 상당산성을 병영의 배후 산성으로 수리하여 활용하였다.

각종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 청주읍성의 들레는 약 1,640m, 성벽의 높이는 약 4m, 성 안에 13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시구개정사업>이란 이름으로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성벽자리에 도로를 설치하고 성돌 부재로 하수시설등을 만들어 읍성을 훼철시켰다.

후세의 우리들은 청주의 옛 모습을 되찾고 청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읍성터의 일부를 발굴하여 성벽 자리를 확인하고, 2013년 3월부터 시민들과 함께 <청주읍성 성돌 모으기 운동>으로 되찾은 성돌과 신재를 이용하여 35m 길이의 성벽을 우선 복원하였다.


[청주읍성 서남쪽 성벽 터]

이 터는 2013년 발굴조사 된 청주읍성 서남 성벽 터이다. 읍성邑城은 고을 주민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만든 성이다. 현재의 성벽은 고려 때부터 있어 오던 것을 조선 성종 때인 1487년 2월부터 3년동안 고쳐 쌓은 것이다.

각종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 청주읍성의 둘레는 약 1,640m, 성벽의 높이는 약 4m, 성 안에 13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성벽은 일제가 <시구개정사업>이란 이름으로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성벽자리에 도로를 설치하면서, 성벽을 헐어 그 돌로 하수구를 만들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성벽 자리와 읍성 안팎은 약 1m 높아진 바닥임을 알 수 있다.


"청주읍성 안내도"


[청주읍성 우물]

10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물을 먹었을까?

청주지역에서 수돗물이 공급 된것은 1923년부터다. 이와 관련된 시설이 1939년 준공된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150번지에 소재한 등록문화재 제355호 동부배수지이다. 

우리 선조들은 수도물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기록에 청주읍성내 우물이 13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유적을 찾았다.

2011년 청주 성안길 우리은행 신축부지 (지하 주차장)에서 1000년전 고려시대 우물과 500년전 조선시대 우물이 발굴되었다.이 우물은 우리은행 건물 신축으로 인하여 현재 이곳으로 이전 복원 되었고. 이 우물의 크기와 형태를 통하여 청주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우물①은 지름 3.1m 크기의 원형으로 굴토하였다. 우물 안쪽에는 너비가 넓은 목재를 이용하여 약 1.2m×1.2m 크기의 정방형으로 기초를 하였으며 자갈들로 뒤채움한 후, 그 위에 돌을 수평으로 쌓아 올렸다. 잔존하는 우물의 깊이는 최고 약 2.15m이다. 축조시기는 A.D1531~1603년으로 대략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우물②는 각목(木)을 이용하여 약 60cm x 60cm 크기의 정방형으로 기초를 한 후, 그 위에 돌을 수평으로 쌓아 올렸다. 잔존깊이는 최고 약 1.7m이다. 축조시기는 A.D1175~1217년으로 대략 고려후기로 추정된다. 이들 우물은 청주읍성 관련 역사유적으로서 내용을 인식시키고자 우리은행 앞에 이전·복원하였다.

청주 우리은행 청주읍성 우물


"청주읍성 남문터"

청주읍성의 남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남문로 2가 남단에 있는 청주읍성 남문터는 청남문(淸南門)이라 하였으며, 홍예문·문루·옹성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리어 성안에 있던 관아와 충청병영의 시설들도 없어졌다.

본래 남문 앞 옹성리(甕城里) 마을은 성안길의 남쪽 끝이며, 성곽도시였던 청주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남문터를 알리기 위해 1994년에 청주 문화사랑 모임이 표석을 설치하였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청주읍성 동문터"

청주읍성의 동쪽 문이 있던 자리.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동문터는 개인문(開寅門 혹은 闢寅門)이라하였으며,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市區) 개정사업 때 헐리었다. 동문의 안쪽에는 감옥과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가까이 있었고, 홍살문을 지나는 큰 길이 청주목 관아와 연결되었으며, 문밖에는 잉어배미라 불리던 논과 그 동쪽으로 문외리 마을이 있었다.

성문 밖의 길은 향교와 성황당으로 이어져 지방 수령이 봄·가을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이 문을 통해 행차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동쪽 문을 폐쇄하기도 하였는데 성문이 폐쇄되어 청주에서 과거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여론 때문에 다시 개통하기도 하였던 기록이 있다.

청주읍성 동문터 앞으로 상당로가 뚫려 성안길에 이은 청주의 중심 길이 되었다. 1994년에 청주 문화사랑 모임이 표석을 설치하였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청주읍성 북문터"

청주읍성의 북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북문로 1가와 2가의 경계에 있는 청주읍성의 북문터로 현무문(玄武門)이라고 하였으며, 홍예문과 문루, 옹성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렸고 북문 안쪽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는 수동으로 옮겨졌다.

1921년 북문 밖으로는 충북선 철로가 놓여졌었고, 지금은 청주의 중심로가 되었다. 

1994년에 청주 문화사랑 모임이 표석을 세웠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청주읍성 서문터"

청주읍성의 서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서문동 96번지에 있는 청주읍성 서문터는 서문동 오거리에서 성안길로 통하는 속칭 족발골목의 입구에 있다.

이곳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이 있었던 곳이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 개정사업으로 헐리었다. 서문의 안에는 충청병영이 있었고 문밖에는 대교천 즉 지금의 무심천(無心川)이 흘렀으며 서쪽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청주성이 함락되자 1592년(선조 25) 8월 초하루 조헌(趙憲)[1544~1592]·영규대사(靈圭大師)[?~1592]·박춘무(朴春茂)[1544~1611] 등이 이끄는 의병이 이 문을 통하여 성을 탈환하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1710년(숙종 36) 서문 밖에 조헌 전장기적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옮겨졌다.

청주의 서쪽 관문이었던 이곳은 서문오거리로 불리며 상업의 요충지가 되었다.

1994년에 청주 문화사랑 모임이 표석을 설치하였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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