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9경 제4경 문헌서원

2024. 4. 10. 11:03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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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팔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한산면 편 [팔경]에는 목은 이색의 한산팔영을 소개하고 있다. 한산읍성을 중심으로 오라리(성외리)의 들판을 전면으로 금강하류와 한산벌을 둘러싼 경 관을 노래하고 있다.

 

[한산팔경 제1경 숭정암송(崇井巖松)]

 

“峯頭蒼石聳 松頂白雲連 羅漢堂寥闃 居僧雜敎禪 / 봉우리 꼭대기 마루엔 푸른 돌 솟아났고, 소나무 머리 위엔 흰구름 이어 있네. 절(나한당)하나 적막하게 있어, 스님들 교종과 선종이 섞여있네”라고 노래하였다.

 

숭정암송의 배경인 숭정산은 한산면 서쪽에 인접한 기산면 황사리에 위치하며 정상에 오르면 기암괴석이 소나무와 어울 려 아름다움을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기슭에는 목은 이색선생 의 문헌서원과 분묘가 모셔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숭정원(崇井院)은 서쪽 7리 에 있고 숭정사(崇井寺)는 기린산(麒麟山)에 있으며, 기린산은 서쪽 5리에 있다. 현재 기린산이라는 지명은 없으나 숭정산 문 헌서원 북쪽 기린봉 지점으로 판단된다.

 

출처:생활권 마을습지 정원문화 연구 - 한산팔경을 사례로 - 박미옥, 구본학


"영모리 장승"


"문헌서원 원경"


"목은이색선생상"


"홍살문과 문헌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문헌서원 (文獻書院)]

 

가정 이곡(1298∼1351)과 목은 이색(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이색묘소와 문헌서원


"진수문과 문헌서원"


"서재(석척재), 진수당, 문헌서원, 동재(존양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이색신도비 (李穡神道碑)]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석에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색(1328∼1396)은 고려 후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는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여러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원·명교체기에 있어서는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고려 후기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여강지역으로 가던 중 생을 마치었다. 

 

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비문에는 ‘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이색신도비와 목은이색선생영당


"목은이색선생영정"


[충청남도 기념물 이색선생묘일원 (李穡先生墓一圓)]

 

고려 후기의 문인이며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1328∼1396)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진사가 되고,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 공민왕 1년(1352)에 전제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한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였으며, 1355년 원나라의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귀국하여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위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1391년에 한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태조 4년(1395)에 한산백으로 봉해졌다.

 

이색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묘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 한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 무덤 앞에는 망주석·문인상·마상(馬像)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서있다. 비는 단순한 형태이며 앞면에 ‘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목은이색선생묘와 문헌서원"


[서천9경 제4경 문헌서원]

고려말 대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학문·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광해군 3년(1611)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헌판을 받아 사액이 된 곳이다. 이곳은 자연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경관 명소로 유명하며, 특히 이색 선생 영당 뒤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장관이다. 배롱나무 꽃은 8월~9월 사이에 만개하며, 우리 전통 건축과 선홍 빛 꽃이 어우러진 자연미를 감상할 수 있다.

 

출처: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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