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찬경루&운봉관

2021. 6. 19. 07:46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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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찬경루, 운봉관"

소헌공원은 2011년 4월 7일에 청송군이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사적공원 으로 지정하였으며, 조선시대에 가장 어진 왕후로 칭송받는 세종대왕비 소헌 왕후 심씨의 시호를 따서 '소헌공원' 이라 이름짓게 되었다. 청송은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이라는 연유로 1459년(세조 5년)에 청송군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되어 437년간 도호부로서 위상을 지켜오다가 1895년 (고종 32년) 갑오개혁 때 다시 청송군이 되었다. 공원 경내에는 객사인 운봉관(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52호) 과 찬경루(보물 제2049호)가 있다.


[보물 제2049호 청송 찬경루 (靑松 讚慶樓)]

「청송 찬경루」는 청송 군수 하담이 1428년 객사와 함께 이에 부속된 관영 누각으로 처음 건립하였고 청송이 당시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그의 가문 청송심씨의 관향임을 들어 관찰사 홍여방이 그 은덕을 찬미하며 찬경루라 이름 지었음. 이 후 1792년 청송 군내 큰 화재로 인해 불에 타 버린 것을 그 이듬 해 중건하였는데 지금의 누는 이 당시 중건된 것임.

찬경루는 자연 암반을 깎거나 다듬지 않고 피하지도 않으며 암반위에 독특하게 입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강릉 경포대에서 최고를 이루며 삼척 죽서루에서도 볼 수 있음.

온돌방 바로 앞에 마루 바닥을 한단 높게 한 것은 연회 행사 시 의전상의 고려인 것으로 보이며, 이와 같이 제례와 배석의 위계 부여를 목적으로 마루 바닥에 높이 차이를 둔 사례는 거창 동계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과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 등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현존 객사 부속 누각에서는 찬경루가 유일함.

또한 누각으로서 온돌이 만들어져 있는 것은 다른 누각에서는 볼 수 없는 드문 사례이며, 가구법에서도 내부에 기둥이 있고 내부기둥에서 대들보(대량)와 툇보(퇴량)가 같은 높이에서 걸리는 5량가 라는 것도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희소한 사례임.

* 5량가: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인 도리가 다섯줄로 걸리는 가구형식

기둥 상부의 날카롭게 치목된 이익공 포작 및 대량과 퇴량이 만나는 형식, 충량의 결구와 지붕의 구성 등은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1793년 누각이 중건될 당시의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함.

* 대량(대들보): 앞뒤 중간 기둥에 걸쳐서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가장 큰 들보

* 퇴량(退樑): 퇴칸에서 고주와 외진평주를 연결하는 보. 툇보라고도 함.

* 충량(衝樑): 한쪽은 대들보에 걸리고 반대쪽은 측면 평주에 걸리는 대들보와 직각을 이루는 보

따라서 찬경루는 건축과 관련된 풍부한 창건 및 중건 기록, 관영 누각으로서의 기능에 부합되고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평면 구성, 조선 후기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가구 양식 등을 고려할 때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만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남.

출처:문화재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운봉관 (雲鳳館)]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해놓은 청송군의 객사이다. 세종 10년(1428)에 부사 하담이 처음 짓고 이후에 여러 차례 걸쳐 수리했다. 

앞면 6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원래는 가운데의 중당을 중심으로 양 옆에 날개부분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에 중당과 왼쪽 날개 부분의 건물이 없어지고, 지금은 남아있던 건물에 현판을 달아 보존하고 있다.


운봉관(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객사: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 건물의 구조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고, 앞면에 중문과 외문, 옆면에 무랑 등이 딸려서 붙어 있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전패: 임금을 상징하는 전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에 세운 나무패. 공무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하였다.
***익사: 중심이 되는 집채의 좌우에 붙어 있는 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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