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팥죽 공양

2021. 12. 23. 09:03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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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 용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옛 절터인 이곳 용화사 부근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 판독결과 고려 후기에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思惱寺)라 밝혀짐으로써 용화사가 무구한 역사의 고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졌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고의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대에 미륵불 7본존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되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기도 하다가 이후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었으며,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용화사의 사적(193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무 6년(1902)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 (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 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출처:용화사


동짓날 청주 용화사를 찾는다. 열 체크와 코로나 19 접종 확인 등을 거친 후 공양간으로 간다. 공양간 앞에서는 자원봉사자 분들과 불자분들이 팥죽을 그릇에 담고 봉지로 포장해 대중들에게 나눠준다. 일반인들, 예불 끝난 불자분들이 포장된 팥죽을 들고 가신다. 동짓날 사찰 팥죽 공양의 모습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동지팥죽’ 글에 따르면 “동짓날 팥죽을 끊여 먹는 풍속은 중국의 풍습에서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공공씨(共工氏)의 자식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疫鬼)가 되었다. 동짓날 그가 생전에 싫어하던 붉은팥으로 죽을 쑤어 역귀를 쫓았던 중국의 풍습이 있었다. 그 전래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목은집』 · 『익재집』 등에 동짓날 팥죽을 먹는 내용의 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는 이미 절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기에 앞서 대문이나 장독대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사하거나 새 집을 지었을 때에도 팥죽을 쑤어 집 안팎에 뿌리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또한, 병이 나면 팥죽을 쑤어 길에 뿌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병마를 쫓는다는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공양간 여불자님이 큰 대접에 팥죽을 담아 주신다. 수저와 따로 준비된 동치미와 김치를 담아 자리로 이동한다.


오관게 내용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음식을 먹기까지 수고하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으로 묵념한다. 묵념 후 여 불자님이 큰 대접에 담아 준 동짓날 팥죽에 동치미와 김장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수저를 한술 크게 떠먹는다. 소금 간이 삼삼하게 된 밥알과 팥물이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 팥과 밥의 비슷한 듯 다른 단맛이 어우러지며 그윽하게 입안에 퍼진다. 은근한 달콤함이 입안에 여운 길게 머문다.

 

신맛이 돌기 시작한 김장 김치는 여전히 아삭아삭하고 시원하다. 동치미 속 무는 단단하게 씹히고 무청은 졸깃하다. 여릿한 단맛과 짠맛이 조화롭게 섞이며 익어가는 국물은 상쾌하다. 담박하고 깔끔한 단맛의 팥죽과 어우러짐이 그만이다. 

 

동그랗게 한입 크기로 빚은 새알심도 맛본다. 쫀득쫀득 찰지게 씹힌다. 고소하고 달금한 팥물이 묻어 더 맛깔나다. 슬며시 먹다 보니 커다란 그릇이 순삭 돼버린다.

 

식재료를 기르신 분들,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신 분들, 함께 팥죽 공양을 하신 분들 모두에게 액운이 사라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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