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

2022. 4. 23. 05:30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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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내 제일 넓은 집"

[국가민속문화재 강릉 선교장 (江陵 船橋莊) Seongyojang House, Gangneung]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예전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은 면적으로 조성되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배다리마을(선교리)에 위치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붙였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 하에 전체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는 이내번이 1700년대에 처음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의 여느 상류 주택과 같이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었므로 (안채의) 부엌 공간을 크게 하였으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하고 민가적인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ㄱ'자형 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이후(李厚)가 순조 15년(1815)에 지었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 (안, 옆, 위)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한꺼번에 모든 건물을 짓지 않은 까닭에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Seongyojang was the house of a high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The name Seongyojang originates from Seongyo-ri, the former name of the village in which this house is located, meaning “pontoon bridge village.” The house comprises the anchae (women’s quarters), sarangchae (men’s quarters), haengnangchae (servants’ quarters), detached quarters, and a pavilion.

The women’s quarters was built before 1700 by Yi Nae-beon and the eastern detached quarters was built in 1920 by Yi Geun-u. Yeolhwadang, the men’s quarters, was built by Yi Hu in 1815 (the 15th year of King Sunjo’s reign).

The western detached quarters used to stand between the women’s quarters and Yeolhwadang, and served as a family library. Hwallaejeong, a pavilion located beside the artificial pond outside the gate, was built one year after Yeolhwadang.

It is designed such that part of the floor protrudes towards the pond, supported by stone pillars driven into the pond. Several household tools which belonged to this house constitute a good resource for studies of life in the Joseon Period.

출처:문화재청


[활래정]

활래정은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시원한 계류에 탁족을 하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장지문을 지르면 두 개가 될 수 있는 온돌방이 물 위에 떠 있는 마루와 합쳐져서 ㄱ자형을 이루고,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손님에게 차를 접대할 때 차를 끓이는 다실이 있다. 벽이 없이 문으로만 둘러져 있어 한층 개방성이 강조되었다. 모두 열어놓으면 정자 속에 앉아서도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연못 가운데에 자그마한 섬 하나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건너 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작은 섬에는 노송을 심어 운치 있게 했다. 못 속에 연을 심어놓아 연꽃이 한창일 때는 활래정 일대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마루 끝에 앉아 연못을 내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1816년 이근우가 중건하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월하문과 활래정


"활래정"

문 사이로 보이는 연못 작은 섬 소나무


홍예헌(선교장에 장기간 머무는 시인묵객들의 거처로 사용된 곳으로, 이들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지원하고 문화예술 정보를 나누던 곳이다. 1815-1830년 지어진 건물이며, 지금은 한옥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과 선교장


선교장 전경(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 우연히 발견한 명당터에 지었다는 선교장은 강원도에서 제일 큰 상류 개인 주택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선교장"


[사랑채 솟을대문]

솟을대문에 선교유거(仙橋幽居/소남 이희수가 쓴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현판이 걸려 있다. 계단 없이 경사진 출입구가 특이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동별당]

원래 동·서 별당이 있었으나 서별당은 현존하지 않고 동별당이 남아 있다. 동별당은 안채의 부엌과 연결된 ㄱ자형으로, 그 용도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안채에 근접된 거처였다. 서별당은 현존하지 않으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으며, 서재이면서 서고로 쓰였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안채]

선교장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가는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다. 이내번이 터를 잡던 시기(영조)의 건물이라 전해지며, 현재 전주 이씨의 후손이 선교장을 관리하며 안채에 살고 있다. 안방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는데, 안방 뒤켠으로 골방이 딸려 있어 무더운 여름철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하였다. 또 안방이나 건넌방에는 각각 벽장이 있고 골방에는 다락이 있어 한국 민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으며, 안방 앞에서 건넌방 앞까지를 연결하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다. 건넌방은 큰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이다. 상당히 넓은 부엌이 눈길을 끄는데, 이씨 일가가 대가족을 거느렸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동쪽에 동별당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연지당(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알때 사용하였고, 방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이다.)


[열화당]

열화당은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철저한 신조로 삼았던 오은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지은 건물로, 선교장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는 시구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장소로 쓰였다.

열화당은 돌계단 7, 8개를 딛고 올라설 정도로 높직하며 보기에도 여간 시원하지 않다. 처마가 높아서 전면에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개화기 때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부가물로 장식 효과도 크게 염두에 둔 장치이다.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앞툇마루는 상당히 넓다. 작은 대청과 대청 사이에 ㄴ자형의 방이 있고, 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으면 방을 셋으로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름에 문을 전부 떼어놓으면 사방으로 통풍이 되며 뒷산의 노송과 대청 뒤뜰에 서 있는 수백 년 된 배롱나무가 사랑채와 하나가 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행랑채]

길게 배열된 행랑채 끝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과 선교장을 둘러싼 노송들이 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중사랑]

선교장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된 건물이며 전국의 학자, 픙류객들과 교분을 나누던 곳이다.


[선교장 둘레길 백호길에서 바라본 강릉 선교장]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릉 지방의 명문인 ‘이내번’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교장’은 ‘열화당’, ‘안채’, ‘동별당’, ‘활래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교장’은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 개인소유의 국가문화재로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선교장’은 300여 년 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온 전통가옥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조선시대 당시의 가옥과 문화를 보여주는 관광지로 관광객에게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출처:강릉시청


[선교장]

경포대에서 대관령 쪽으로 향하면 노송 수백 그루가 우거진 골짜기가 있고 그 사이로 날아갈 듯 추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살림집이 있다. 강원도내의 개인 주택으로서는 가장 넓은 집인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 주택이다. 당시 이씨 일가는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지주였는데, 평야가 적은 이곳에서 ‘만석꾼’이란 너른 남도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부(富)였을 것이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너 다닌다 하여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고 불렸는데,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전주 이씨 일가가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 때였다. 이내번은 처음에 경포대 주변의 저동에서 살았는데, 족제비떼를 쫓다가 우연히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시루봉)가 평온하게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천하의 명당을 발견하고는 곧 새집을 짓고 이사했다고 한다. 그 뒤로 가세가 크게 번창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선교장]

총건평이 318평에 달하며, 긴 행랑에 둘러싸여 있는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문 밖에 활래정까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장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전체적으로는 일반 사대부집과 달리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긴 행랑채 가운데에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나란히 두었다.

선교장의 또 다른 특징은 추운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지방의 개방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살림집은 대개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곧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산골짜기 집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자리 잡은 남쪽 집의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선교장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며, 안채의 낮은 마루와 아늑한 분위기는 사랑채와 대조를 이룬다.

한편 상류 계급의 호화로운 주택인 선교장 주변에 하층 계급의 초가들이 모여 있어 조선 시대의 엄격했던 계급 사회상을 짐작하게 한다. 본채인 선교장으로 들어서기 전, 행랑채 바깥 마당에 있는 수십 평의 연못에는 온갖 정자의 멋을 살려 만든 호화로운 활래정(活來亭)이 세워져 있는 데 반해, 그 주변에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노비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선교장 유품 전시관"

김규진 모란도/김구서체, 홍엽산거 현판 김정희/홍엽산거 현판 김정희, 대원군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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