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수도 부산 그 역사의 시작, 부산박물관

2022. 5. 29. 06:18바롱이의 쪽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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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1978년 개관한 우리 박물관은 각지의 여러 공립박물관과 비교해 보더라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설은 퇴락하고 협소하여 세계도시로 성장해 가는 부산의 정체성 부각과 시민긍지의 상징물로는 다소 미흡한 실정이었습니다. 

이에 2002년에는 그동안 발굴, 기증, 매입 등을 통해 확보된 유물을 바탕으로 부산관을 신축하여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 시민 여러분들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 제공을 위해 노후된 시설들을 개선해 나가고 있습니다. 2014년 동래관 리모델링 완료, 2015년 보존관리동 신축에 이어 2017년 7월에는 리모델링한 부산관을 재개관하여 새로운 박물관 도약을 앞두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되고 소장된 유물들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역사와 문화의 성격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증거물들이며, 앞으로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계시(啓示)해 줄 지혜 창출의 보물들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박물관은 우리 고장과 관련된 전통문화자료의 수집과 보존, 연구 및 전시를 통하여 종합박물관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다. 시민 만족의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도 운영하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즐겨 찾는 열린 역사문화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다각적인 국내외 교류를 활성화하여 "동북아시아 최대 항구도시 부산의 위상에 걸 맞는 박물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출처:부산박물관


"해양수도 부산, 그 역사의 시작"


[사적 부산 동삼동 패총 (釜山 東三洞 貝塚) Shell Mound in Dongsam-dong, Busan]

신석기시대 사람이 버린 각종 생활 쓰레기와 조개껍질이 쌓여 이루어진 동삼동패총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패총 유적이다. 1929년 일제강점기에 처음 발견된 이래 201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서 10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동삼동패총은 기원전 5,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패총뿐만 아니라 독무덤〔옹관묘〕, 주거지, 화덕자리 등 각종 생활 시설물을 포함하는 대규모 복합 유적임이 밝혀졌다.

동삼동패총은 퇴적 층위와 유물의 성격에 따라 크게 초기에서 말기까지 5개 문화층으로 구분되며, 각 문화층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골각기, 패기〔貝器〕, 장신구, 의례구를 비롯하여 일본 규슈〔九州〕산 흑요석과 조몬〔繩文〕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밖에 신석기시대 생업형태와 식생활을 알 수 있는 고래, 호랑이, 멧돼지, 사슴, 어패류 등 각종 동물 유체와 조, 기장 등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조와 기장은 신석기시대 잡곡 농경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삼동패총은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이른 시기부터 해양 활동을 통해 일본 규슈〔九州〕지역까지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영문 설명]

The shell mound was formed in the Prehistoric Age by the waste shells that piled up after being thrown away by local inhabitants after eating shellfish. Through it, we can see something of the living pattern of the age. The site is located on a hill slope near the seashore in Dongsam-dong. It shows earth layers piled up over a long time through the duration of the New Stone Age. It consists of five layers, and as well as shells, farming tools, everyday necessities like stoneware, and animal bones were also found here.

Excavation of primitive pattern-less pottery and pottery with comb patterns, typical of the New Stone Age, has contributed greatly to the study of the cultural state and the lifestyle of the time.

출처:문화재청


"조개가면, 호랑이 모양 허리띠 장식"


"석탑의 옥개석과 탑신"


"청자 나한좌상"


[보물 부산진순절도 (釜山鎭殉節圖) Busanjin sunjeoldo (Patriotic Martyrs at the Battle of Busanjin Fortress)]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는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비단바탕에 그려진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 것인데 처음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전투장면을 내려다 보듯 묘사하였는데, 그림 오른쪽 중간에 부산진 성곽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을 왜병 및 왜선이 빈틈없이 에워싼 모습은 아군과 적군의 심한 전력의 격차를 보여준다. 

그림의 작품성은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으나,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정기를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영문 설명]

This is the picture of a battle that was fought against Japanese forces from April 13th to 14th, 1592, the 2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of Joseon, at Busanjin Fortress. It was painted on silk by Byeon Bak, an artist of later Joseon, and it is 96 cm wide by 145 cm long.

It was originally painted in 1709, the 3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repainted in 1760, the 3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 first version later disappeared. It takes a birds-eye view overlooking the scene, so it depicts the battle effectively and realistically. The Japanese ships and soldiers are surrounding the destroyed fortress closely at the center-right of the picture, which shows clearly the difference in military strength between the two sides. This battle, which occurr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resulted in defeat, and the fortress was taken.

The quality of the work is not highly rated but it is regarded as an important historical document embodying the national spirit.

출처:문화재청


[보물 동래부순절도 (東萊府殉節圖) Dongnaebu sunjeoldo (Patriotic Martyrs at the Battle of Dongnaebu Fortress)]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영문 설명]

This is a documentary picture depicting the scene of a battle fought by the military and the people against Japanese troops at Dongnaeseong Fortress on April 15th, 1592, the 2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The Joseon commander, Song Sang-hyeon, died in the battle.

The picture was originally painted in 1709, the 3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repainted in 1760, the 3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Yeongjo, by Byeon Bak, an artist who came from Dongnae. It is painted on silk and it is 96 cm wide by 145 cm long. The artist takes a birds-eye view of the scene so it depicts the fierce battle effectively and realistically. Dongnaeseong Fortress is placed in the center and soldiers are defending it from a turret in the south. The Japanese soldiers are surrounding them three ranks deep and preparing to attack. There is a scene of soldiers throwing a board saying "Easy to die but hard to retreat" at the Japanese soldiers in the lower part of the castle. In another scene, Song Sang-hyeon is dying in a red court suit sitting at the north, while another officer, Yi Gak, and his troops are retreating outside the north gate. Mountains in the upper part of the picture are shown by marking with lines and dots, and they look awkward.

The composition, shape and style of the painting are generally regarded as rather awkward, and compared to its theme, its artistic quality is not rated highly.

출처:문화재청

보물 동래부순절도(<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 문화재청)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류성룡 필 진시무차 초고 (柳成龍 筆 陳時務箚 草稿)]

이 작품은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국가의 시무(時務)에 대하여 올린 차자(箚子)의 초안이다. 1633년(인조 11)에 간행된 『서애집(西厓集, 서애선생문집)』 권5, 차(箚), 「진시무차(陳時務箚) 임진 11월 재정주(壬辰十一月 在定州)」의 초고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이 차자는 세로로 116행의 초서(반초서)로 쓰여 있으며, 가로로 9장의 한지를 이은 두루마리 형태로, 첫째 장은 앞부분이 잘렸고, 아홉째 장은 끝 부분의 배면 글씨가 잘렸다. 다섯 째, 여섯 째 장은 길이가 다른 장에 비해 좁고 다른 지질에 전후의 묵적과 다르게 갈필(渴筆)로 되어 있어, 수정 가필함에 따라 다시 써서 이은 것으로 짐작된다.

내용은 국가의 위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인심이므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즉시 상을 주도록 하는 등 흩어진 민심을 규합할 세부 계획과 강원도 산척(山尺, 사냥이나 약초 캐는 자)을 복병으로 활용하여 왜적 북로(北路)군의 수미(首尾)를 절단시킬 것, 경성 수복의 계책, 풍년을 맞은 호남의 곡식을 영남으로 옮겨 백성을 구제할 것 등을 비롯하여 변방의 보고를 즉시 처리해 시사(時事)에 만전을 기하고 게릴라전을 활용할 것 등이 중심이다.

『서애집』에 실린 「진시무차(陳時務箚)」와 이 초고는 경기감사 최원(崔遠)의 실행(失行), 함흥의 적을 소탕하는 일, 송언신(宋言愼)의 교체 관계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초고 작성 후에 발생한 변동 사항을 첨가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 관련 기본 사료로서 주목할 만한 자료이며, 임진왜란 당시 위정자의 시국관과 극난극복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서애집』에 최종적으로 수록된 「진시무차」와는 상당 부분이 동일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양자 간에 서로 첨삭된 부분이 있어 초고가 가지는 고문서로서의 가치도 뛰어날 뿐 아니라, 이 초고는 현존하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도 그 자료적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통신사 행렬도"


[부산광역시 기념물 약조제찰비 (約條製札碑)]

조선 숙종 9년(168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쓰시마섬주와 왜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5개 조항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직사각형의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비문의 내용은 첫째로,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온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둘째, 노부세(路浮稅:통행 수수료)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셋째, 시장을 열었을 때 각 방에 몰래 들어가 암거래를 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넷째, 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창고지기·통역 등은 일본인을 붙들어 끌어내어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다섯째로, 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 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왜관에 있는 여러 사람은 만약 볼일이 있으면 왜관 사직(司直)의 통행증을 가지고 훈도와 별차가 있는 곳에 왕래할 수 있다 등이다. 

숙종 9년(1683) 8월에 세운 비로, 원래 초량 왜관이 있던 용두산 공원에 있었는데 1978년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출처:문화재청


"개항 1876"


"조일수호조규"


"홍보용 태극기 문양"


"사보담 부부 소장품"


"일제의 지배와 침략정책"


"국채보상운동, 민족교육의 확립"


"대한독립선언서"


"8.15 광복, 대한민국 헌법"


"6.25 전쟁"


"유엔군 참전, 참전기념 손수건"


"다시, 부산에서 만나자"


"영도다리, 40계단, 피란 학교"


 "임시수도 부산, 1023일"


"직할시 길을 열다"


[국보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 蠟石舍利壺) Agalmatolite Reliquary from the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Seongnamamsa Temple Site, Sancheong]

경상남도 지리산 암벽 아래에 있는 암자터에서 불상이 없는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항아리로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 지름 8㎝이다.

몸통에 비해 도톰한 턱이 주둥이에 둘러져 있고, 밑 부분은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항아리의 아가리 아랫부분과 몸체의 중간, 그리고 조금 아래쪽에 각각 2줄의 가로선을 새겼다. 뚜껑 윗부분에도 2줄로 원을 그리고 안쪽 가운데에는 연꽃을 새겼다.

이 항아리 표면에는 15행으로 돌아가며 비로자나불의 조성 기록과 함께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766)>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새겨진 글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애매한 곳도 있으나, 죽은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길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제작 기법이나 뚜껑 처리 방식, 글자의 새김 등 미술사적 측면과 비로자나불의 제작연대, 석불의 법사리 봉안과 조성 등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문 설명]

Produced during the Unified Silla Era, this jar is made out of a darkish pencil stone. Its total height, including the lid, is 14.5cm. The height of the body (without the lid) is 12cm, 9cm in diameter on top and 8cm on the bottom.

Discovered inside a support stone in the center of a stone Buddha, it has since then been in residence for months and years inside a monk's cell located in a rocky valley of Jirisan Mountain in Gyeongsangnam-do Province. Some of its features include: 1. Enclosing of a projection rather thick than the body around the mouth, a sense of stability from the flat and wide base of non-hoof. 2. Two horizontal lines carved just below the jar's muzzle, middle of the body, and midway between the middle of the body and the bottom. 3. On top of the lid are two lines that form a circle and in the inner center is an engraving of a lotus flower.

On the image of the Vairocana Buddha, a record of the jar's production is inscribed. Written in 15 lines of verse, the record concretely says that the jar was made during the second year of Yeongtae, or the second year of King Hyegong's reign (A.D. 766). This inscription has contributed much to understanding when this jar was manufactured: the 8th century, much earlier than it was originally thought. Interpretation of the 15 lines of the verse is somewhat flexible for some of the carved letters were written irregularly. According to experts, though the inscription is difficult to read, the general understanding of the verses is that it was used to console the souls of the dead and promote prosperity and adversity to all mankind. Though a box with paper reduced to ashes (at the time of digging) was discovered, the Jar is regarded as the first discovery of a reliquary in a support stone of a Budda statue in Korea.

Therefore, the Jar is regarded as precious historical evidence concerning the study of Buddhism and art history. For the former, it is based on lying in state of Sarira--the terms of its manufacture and its reasons. The latter is on the basis of the skills related to writing the letters, the technology used in manufacturing the lid, the materials used, and the overall work.

출처:문화재청


"다른 불신, 하나의 염원"


[보물 칠태부인경수연도 (七太夫人慶壽宴圖) Chil taebuin gyeongsuyeondo (Celebration for Longevity of Seven Elderly Ladies)]

<칠태부인경수연도(七太夫人慶壽宴圖)>는 왕의 명령과 보조를 받아 70세 이상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신하 7명이 1691년 8월 경수연(장수를 축하하고자 베푼 잔치)을 치른 후 기념으로 제작하였던 것을 1745년 이전 어느 시점에 새롭게 제작한 작품이다. 경수연도는 양로(養老)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가행사도(私家行事圖)의 일종이다. 

이 작품은 후대 모본이지만 유연하면서도 차분한 필선, 변화있는 세부 표현, 행사 내용의 요약적인 전달력 등을 갖추고 있어 회화적으로 우수한 행사기록화로 평가된다. 그런가하면 가로로 길게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횡권 형식을 취하여 행사의 순서에 따라 작품을 전개시킨 방식은 드문 예로 판단된다.

또한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의 33세 때 필적이 포함되어 있어 작품의 제작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고, 아울러 희소한 강세황의 30대 초반 필적을 볼 수 있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 글은 연회가 베풀어졌을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권해(權瑎, 1639~1704년)가 지은 것인데, 권해의 증손인 권조언(權朝彦, 1710~1778년)의 부탁으로 1745년 음력 7월 강세황이 쓴다는 내용이 있어 행사가 치러진 후 54년 만에 기록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칠태부인경수연도는 현전하는 경수연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주목되는 것이다.

[영문 설명]

Chil taebuin gyeongsuyeondo (Celebration for Longevity of Seven Elderly Ladies) is a copy of the painting that depicted a banquet held in the 8th month of 1691 by the king’s order and support to celebrate the healthy, long life of seven noble ladies aged over 70 and whose sons were serving as high-ranking officials. Reproduced before 1745, the painting provides a fine example of the tradition of recording important family celebrations with painting as established among the ruling class of Joseon.

Despite the fact that this is a duplication made at a later time, the painting has still been widely praised for the composed yet firm, brush stokes, elaborate expression of details, and persistent focus on the central event and effective delivery of its message. The use of hand-scroll format on which the event is arranged horizontally according to the passage of time is also highly regarded as a rare example.

The hand-scroll contains a piece of calligraphy written by Gang Se-hwang (1713-1791) when he was 33 years old, adding to its value not only because it informs viewers of the exact date of its production but also due to Gang’s early handwriting, which has been very rare. The postscript reveals that it was originally composed by Gwon Hae (1639-1704), then First Counselor in the Off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written by Gang 54 years later at the request of Gwon Jo-eon (1710-1778), the Counselor’s great grandson. The record shows that the painting is one of the earliest of its kind.

출처:문화재청


"부산의 얼굴들"


"만덕사지 삼층석탑"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유원각선생 매안감고비 및 비각 (柔遠閣先生 埋案感古碑 및 碑閣)]

이 석비는 광무 10년(1906)에 세워졌으며, 조선 후기 대일외교의 실무관청이었던 유원각(柔遠閣)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 자료이다.

비석에는 비의 건립배경과 목적,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어, 약조제찰비(시도기념물 제17호)와 함께 왜관(倭館) 및 조선 후기∼근대의 부산역사와 대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비각은 전통적인 목조 기와지붕의 비각과는 달리 비각 전체가 석조로 조성된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며, 비각의 형태나 결구방식도 전통적인 양식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생산사적 측면에서 크게 주목되는 자료이다.

특히 비각은 오랜 동안 대일 외교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부산의 지정학적 입장에서는 한일 문화의 교류와 전파의 단초가 된다는 점과 비각 건립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적 산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유구이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기념물 척화비 (斥和碑)]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에게 서양 오랑캐에 대한 경계심을 드높이고자 전국 곳곳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원래 부산진의 성지에 세웠던 것이지만, 용두산 공원에 옮겼다가, 1978년 지금 자리로 옮긴 것이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글을 새긴 비몸을 얹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에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강한 어투의 경고문구를 담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기념물 동래남문비 (東萊南門碑)]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충렬(忠烈)을 기리어 당시의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비로, ‘동래충렬비’라고도 부른다. 

현재 비는 받침돌 위에 크게 훼손된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그 위에 얹었던 머릿돌을 옆에 따로 놓여 있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음날 싸움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일, 병사 이각의 비겁한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과 비장 송봉수·김희수·향리 송백·교수 노개방·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왜병들과의 처절한 싸움내용과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고 비를 세우기까지의 경위를 밝혔다. 

비는 현종 11년(1670)에 처음 세웠으며 숙종 35년(1709)에 별사 앞뜰에 옮겼다가 영조 12년(1736) 별사가 없어지면서 남문 안으로 옮겨 놓았던 것을 1976년 시가지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현종 9년(1668)에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이 썼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 (東萊府使 柳淰 善政碑)]

선정비는 지방관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인데, 이 선정비는 동래부사를 지낸 유심(柳淰)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전체적으로 비몸에 비해 머릿돌과 받침돌이 다소 작은 편이나 조각 기법이 조선시대의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면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효종 2년(1651)에 세운 이 비석은 비몸, 받침돌, 머릿돌 등 거의 훼손된 부분이 없이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세운 연대와 석재를 다듬은 석공(石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온전한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이 비석은 부산지역에 세워진 선정비로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할 뿐만 아니라 세워질 당시의 조각 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효암리 월경 전복채취금령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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