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민의 역사문화 사랑방, 양산시립박물관

2022. 6. 1. 06:09바롱이의 쪽지/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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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의 역사문화 사랑방"

[양산시립박물관]

양산시립박물관은 2013년 4월 개관했다. 경남도에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박물관 가운데 유일한 ‘제1종 종합박물관’(제49호)으로, 대지면적 13,063㎡, 연면적 5,572㎡에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자체 박물관으로는 매우 규모가 큰 편이다. 박물관은 전문 인력과 소장유물, 시설 등에 따라 1종과 2종으로 구분하고 1종은 다시 종합박물관과 전문박물관으로 나뉘는데, 제1종 종합박물관은 박물관 가운데 최고 등급이다.

특히, 양산시립박물관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박물관이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을 2017년과 2019년 2회 연속 달성했고, 경남 공립박물관 20곳 가운데 최우수 기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참여형 전시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으로, 시민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지역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연 2회 이상 특별기획전을 열어 시민의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은 양산부부총과 금조총에서 출토한 금관과 금장신구 등인데, 신라 고분 문화 전파와 계보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양산시청

양산시립박물관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양산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


"2.8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국가등록문화재 태극기 목판 (太極旗 木版) Taegeukgi Woodblock]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4괘와 태극문양을 새긴 목판으로 희귀할 뿐 아니라 당시 제작기법과 상황을 헤아릴 수 있는 것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영문 설명]

The wooden board was intended for printing of Taegeukgi by engraving the four divination signs and Taegeukgi designs. This rare artifact is highly valuable historical material that shows the production methods and situations of its time.

출처:문화재청


"경남지역 3.1만새운동의 발원지"


"통도사 지방학림 전경"


"통도 5절과 만우스님, 발우"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독립선언서"


"김구 유묵 지행합일"


[보물 김구 서명문 태극기 (金九 署名文 太極旗)]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와 서명을 써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미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달했고, 후손들이 보관해오다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세로 44.3cm, 가로 62cm 아담한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태극기이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乾卦)와 감괘(坎卦), 하단에 이괘(離卦)와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김구와 안창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정확한 제작시기가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2013) (大韓民國 臨時議政院 太極旗(2013)) Taegeukgi of the Provisional Korean National Council]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붕준(金朋濬, 1888∼1950) 일가가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 3점은 부인인 노영재가 1940년대를 전후하여 제작한 것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정부공보 제75호(대한민단 24년 8월 20일)에 게시된 태극기와 유사한 형태다.

특히 재봉틀 박음질 제작기법이나 제작구도를 볼 때 중경 임시정부 시절 제작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비슷하여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사의 국가 표상적인 맥을 함께 할뿐 아니라 국기 변천사를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영문 설명]

These three Korean national flags for the Republic of Korea -- currently in the family of Kim Bung-jun (1888~1950) who serve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1919~1945) as chairman of the Provisional Korean National Council and member of the Cabinet Council -- were made by his wife No Yeong-jae in the 1940s. The flags display a form similar to that of the flag printed on Bulletin No. 75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published on August 20, 1924.

Historians are particularly interested because the sewing-machine stitches of the flags are very close to those of the flag (Registered Heritage No. 388) carrying the signature of Kim Gu (1876~1949), made when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was based in Chongqing, China. Such suggests a close histor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flags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출처:문화재청


"독립만세운동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범"


"김구 유묵 노당익장, 뇌홍식 권총, 일본도"

노당익장(늙어서도 기운이 좋아진다)


"양산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운현진선생 장례식 사진, 정안사 윤현진 묘비 사진"


"양산의 항일독립운동가"


"독립선언서"


[국가등록문화재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大韓獨立萬歲’ 太極旗) Taegeukgi with Chinese Characters Meaning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가늘고 긴 삼각형 형태의 깃발 속에 제작된 태극기로 미국에서 광복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태극기 변천사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설명]

This Taegeukgi is produced in a long triangle banner. It is assumed to have been produced in the United States before the 1945 Liberation, and provides valuable data for the historical study of Taegeukgi’s transformation related to independence movement that took place in the United States.

출처:문화재청


"양산 지산리 부부상"

양산 지산리 부부상(김서현 장군상, 만명부인 상)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 - 양산"


"이원수선생 유품"


[보물 양산이씨 종가 고문서 (梁山李氏 宗家 古文書) Documents of the Yangsan Yi Clan]

이 문서는 거의 조선 전기의 것으로, 양산이씨의 시조(始祖)인 이전생과 조선 전기 이름난 3명의 형제장수인 징석과 징옥, 징규와 그들을 포함하여 직계후손 몽란까지의 장남, 자손들에 관련된 문서이다. 총 6종 16점이다.

이전생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20년(1371) 순찰사로 경남지방을 돌아보았고, 지금의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살게 되니 여기서 양산 이씨가 시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공조전서, 예조판서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고, 후에 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전생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가선대부공조전서로 임명받는 내용이 담긴 사령서인 왕지 1점과 징석 관련 문서로 왕지 4점, 장수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긴 유서 1점, 왕이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내용의 사패교지 3점, 그리고 징석이 죽은 후 세조임금이 내린 사제문 등이 있다. 그리고 징석의 장남 팔동이 받은 교지와 징석의 직계후손인 몽란이 병조에서 발급받은 교첩,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지, 이몽란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하여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이몽란선무원종공신록권」 등이 있다. 각 문서의 크기는 연도와 내용에 따라 다르다.

이씨 문중이 보관하고 있는 이 문서들은 왕지, 유서, 사제문, 사패교지 등 조선 전기의 각종 문서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의 고문서들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영문 설명]

Written in the early Joseon Period, these documents were for Yi Jeon-saeng, founder of Yangsan Yi’s Clan, Yi Jing-seok, Yi Jing-ok, and Yi Jing-gyu, three famous commanders of this family, and Yi Mong-ran, eldest son of a direct descendant. There are 16 documents of 6 different kinds, including Yi Jeon-saeng’s writ of appointment, four writs related to Jing-seok, a message for the benefit of the commander, three royal edicts of bestowing land and servant, and a message posthumously appointing Jing-seok as government official.

The documents also include the royal edict issued to Pal-dong, eldest son of Jing-seok, the certificate issued to Mong-ran for passing the military examination, and the royal certificate of Meritorious Subject issued to Mong-ran in recognition of his remarkable achievement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sizes of these documents varied depending on the year and contents. Preserved by the Yi Family, these documents provide important historical information on studying the old document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출처:문화재청


"가야진용신제"


"가야진용신제 의식용구"


"침하돈"


"부부총"


"양산 부부총 발굴 보고서 원본"


"부부총 출토 금동관"


"부부총 출토 목걸이와 귀걸이"


"금조총"


"금조총의 출토유물"


"금조총 출토 금제새다리"


"금조총 금귀걸이"

수백개의 금알갱이를 붙어 만든 금속공예의 백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양산 척화비 (大院君斥和碑)]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온 백성에게 일깨워 주고자 전국의 중요 지역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비는 네모나게 깎은 돌의 모서리를 자른 간단한 형태이다. 비에는 굵은 글씨로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 옆에도 작은 글씨를 새겼는데. 내용은 “자손만대에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이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 전국 각지에 세웠다가, 고종 19년(1882)의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이어 개항을 맞게 되자 대부분이 철거되고 이처럼 몇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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