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사랑하는 고찰, 양양 낙산사

2022. 6. 17. 04:50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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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사랑하는 고찰"

[사적 양양 낙산사 일원 (襄陽 洛山寺 一圓) Naksansa Temple and Surroundings, Yangyang]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영문 설명]

Three excavations were conducted on the site of Naksansa Temple after it was destroyed by wildfire in 2005.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temple underwent several major reconstructions after its foundation by Great Master Uisang in 671,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mu of Silla. The temple was repaired and expanded in 858, the second year of King Heonan of Unified Silla, under the initiative of National Preceptor Beomil. It was reconstructed again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r.1455-1468) of the Joseon Dynasty.

The temple compound has several designated cultural heritages, including a seven-story stone pagoda from early Joseon, the walls surrounding the Wontongbojeon Hall dedicated to Avalokitesvara, Hongnyemun Gate, a stupa, Hongnyeonam Hermitage, and Uisangdae Pavilion, which is located on a cliff overlooking the coast. The beautiful scenery of the adjacent beaches has long been prized as one of the eight most outstanding scenes of Gangwon-do Province, and has inspired many literary works.

출처:문화재청


"관음성지 양양 낙산사 일주문"


[낙산사 산불재난안전 체험장]

2005년 4월4일 23:53분 양양읍 화일리 도로변 임야에서 산불이 강한 강풍으로 인해 급속도로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4월 5일 15:10분경 낙산사를 덮쳐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을 비롯한 홍예문, 원통보전, 근행당, 신검당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화마로 소실되었다. 이에 산불로 소실된 문화재의 흔적을 전시하여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문화재의 중요성과과 기치를 재발견하는 계를 마련하고자 낙산사 산불재난안전 체험장을 설치 하게 되었다.

2005년 화재로 녹아버린 보물 낙산사 동종과 해수관음석등을 재현하였다. 화마로 소실된 불전의 기왓장으로 쌓은 탑 사이로 불에 탄 나무 그루터기가 보인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낙산사홍예문 (洛山寺虹霓門)]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낙산배 시조목"


"담장과 원통보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낙산사담장 (洛山寺垣墻)]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襄陽 洛山寺 七層石塔) Seven-story Stone Pagoda of Naksansa Temple, Yangyang]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영문 설명]

The seven-story stone pagoda at Naksansa Temple was originally built as a three-story pagoda but it was rebuilt with its present appearance in 1467, the 13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jo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time of its reconstruction, it is said that a Buddhist rosary and a cintamani were sealed inside. With the change of the governing ideology from Buddhism, which had had a thousand year long history as the state religion, to Confucianism at the foundation of Joseon Dynasty (1392 -1910), Buddhism went into a decline. However, there was no way to stop the formative arts related to Buddhist from disappearing, and so remnants of the Goryeo Dynasty still remained in the early days of Joseon. Therefore, some works in the style of Goryeo and showing the same workmanship were made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This pagoda is one example of a Goryeo style pagoda built during early Joseon.

The foundation on the square ground stone is carved with 24 lotus petals. The main body is composed of seven stories of core stones and roof stones. A particular feature is a single layer of wide, thick supporting stone placed on the core stone of each story. The square roof stones slope gently and curve swiftly upwards at their corners.

The finial, including a long iron stick, which has survived well, is similar to ones found on the Lama Pagodas built during the Yuan Dynasty of ancient China. In general, this pagoda follows the style of Goryeo Dynasty pagodas, but it was built in a much simpler way than they were.

The main body can be compared with those of other pagodas such as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Sinboksa Temple Site, Gangneung (Treasure No. 87) and the Octagonal Nine-story Stone Pagoda of Woljeongsa Temple, Pyeongchang (National Treasure No. 48).

출처:문화재청


"보물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원통보전"


[보물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襄陽 洛山寺 乾漆觀音菩薩坐像)Dry-lacquered Seat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of Naksansa Temple, Yangyang]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문 설명]

This image of Avalokitesvara Bodhisattva portrays him as sitting cross-legged on an octagonal metal pedestal, with the back straight and the head bent slightly forward. The crown he wears looks very flamboyant. His square-shaped face does not look rigid. His facial features are neat, and the three lines on the neck are clear-cut. The chest is portrayed as rather conspicuous. His right hand is held up to chest level, with the left hand put near the belly. The thumbs are touching the middle fingers, and the robe hung on both shoulders flows down naturally. Gorgeous-looking bead accessories adorn the entire body.

The way the image is portrayed tells us that the piece was made in the early Joseon Period (1392-1910), based on the traditional styles of the late Goryeo Period (918-1392). Overall, the body is well-proportioned, and the facial expression is nice. The well-preserved status of the crown makes the piece a precious material for those studying ancient crowns.

출처:문화재청


"보타전과 해수관음상"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국도 7호선"


"의상대와 낙산항 방파제"


[해수관음상]

낙산사를 대표하는 불상처럼 알려져 있는 높이 16m의 해수관음상은 1977년에 완성되었다. 그 높이는 단일 불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하며, 마치 등대처럼 10리 안팎까지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이 불상이 ‘관음’인 것도 창건 당시의 관음 신앙을 상기시켜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기도 드리는 불자와 해수관음전에서 바라본 해수관음상


[보물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襄陽 洛山寺 海水觀音空中舍利塔·碑 및 舍利莊嚴具 一括) Stupa, Stele, and Reliquaries of Naksansa Temple, Yangyang]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일급의 석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첫째,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져 비슷한 시기의 승탑을 비롯한 관련 석조물의 편년에 소중한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둘째, 매우 드물게 현존하는 이른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가 추가되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셋째, 양식적으로나 세부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 유사성이 다분하여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 나아가 절집 석조물과 그 밖의 석조물의 양식적인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는 그 자체만으로는 조선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와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 비의 가치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괄은 인위적인 손상 없이 처음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되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접어들 무렵까지도 사리병―금합―은합―동합의 순으로 매납용 사리기를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전통적인 사리 장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주목에 값한다. 또한 사리장엄구의 일부로 수습된 비단 보자기 11점은 그 양호한 상태, 색채의 선명성, 무늬의 다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직물사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가지 유물, 즉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추어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은 낱낱의 유물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지만 함께 보존되고 관리될 때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영문 설명]

This monastic stupa of Naksansa Temple in Yangyang is far from a masterpiece of stonework. It is, however, a monument of high significance for several reasons other than aesthetic reasons: Firstly, this stupa with a clearly established date of creation (1692) is valuable for dating other stupas and stone monuments from the similar historical period.

Secondly, it is one of the very few surviving stupas in the style of a pagoda.

Thirdly, in terms both of its overall style and details of stonework, this stupa is highly similar to the stone lanterns found in Joseon kings’ graveyards, hinting, therefore, at the existence of a relationship of mutual influence between the two types of stone monuments, and by extension, between temple stone structures and stone structures at secular sites.

As for the stele that is paired with the monastic stupa, it is a rather ordinary-looking stone monument in a generic late Joseon style. However, as an element of this set of three items for enshrining a monk’s sarira, namely, the stupa, stele, and reliquaries, this stele must be evaluated also in relation to its role within the whole it is a part of. The text inscribed on this stele, for example, is identical to the text in a document enshrined in the stupa, as part of the reliquary set.

The reliquary is particularly valuable, as its components are completely undamaged and were found undisturbed from the state at the time of their enshrinement. From this set in which the sarira bottle is placed inside a gold casket, then inside a silver casket, and finally inside a bronze casket, one learns that this traditional style of nesting sarira receptacles remained in use all the way to the beginning of the early Joseon Period. Meanwhile, the eleven pieces of silk cloth found along with the reliquary set are vivid in color and richly varied in textile motifs. These fabrics in exceptional condition can shed important light on the history of Korean textiles.

This set of a monastic stupa, memorial stone and a reliquary constitutes a rarity, not just because of its pristine condition, but also because few complete sets of such kind have survived to the present. Therefore, in its future preservation, it is also important that the elements making up this set be kept together, as much of their value derives from their relationship to one another.

출처:문화재청


[사적 양양 낙산사]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관음보살의 진신이 근처 해변의 굴속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의상대사는 굴에 들어가 예불을 하였다. 그러던 중 관음보살이 나타나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세울 위치를 알려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칭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 과정을 거쳤으며, 현재 보물 제1723호 공중사리탑과 보물 제1362호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제499호 칠층석탑을 비롯하여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가치가 뛰어난 성보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신청 시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출처:양양군청


[보타전]

원통보전.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불전이다. 불전 내부에는 천수.성.십일면.여의륜.마두.준제.불공견색의 7관음과 32응신.1500관음상을 봉안하였다. 낙산사 경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전이다.


[보물 낙산사동종 (洛山寺銅鐘) Bronze bell of Naksansa Temple]

조선 예종 1년(1469)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높이 158㎝, 입지름 98㎝의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동종이 소실, 용해되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5년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글, 사진 출처:문화재청


"의상기념관 2005년 화재로 녹아버린 보물 낙산사동종"


2005.4.5 양양에 발생한 산불로 많은 요사채와 당우가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옛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원통보전 대들보로 첼로, 바이올린, 진열장 등을 만들었다.


"길에서 길을 묻다"


"의상대 앞 작은 소나무와 동해바다"


"소나무와 해수관음상"


[부처를 만나는 정자, 의상대]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올라 직접 산세를 살폈다고 전해지며, 의상대사의 좌선 수행처라고도 알려져 있다. 1925년 건립 후 폭풍, 붕괴위험 등을 이유로 여러 번의 중건을 거쳤으며 현재의 의상대는 1995년 8월, 육각정으로 복원된 모습이다. 낙산사에서 관음굴로 가는 언덕 위 자리하고 있고, 의상대에서 내려 보는 동해의 풍경과 해안절경이 유독 빼어나 ‘관동팔경’으로 손꼽힌다.

출처:양양군청


[강원도 문화재자료 낙산사홍련암 (洛山寺紅蓮庵)]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홍련암 개구리 상 삼족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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