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레의 큰 스승, 백범김구기념관

2022. 8. 8. 05:03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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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白凡金九記念館)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1876년 ~ 1949년)를 기념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임정로 26)에 건립된 박물관이다. 2002년 10월 22일에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며, 2008년 12월에 백범기념관에서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 김구의 어린시절부터 서거까지의 행적을 따라 관련 유물을 배치하였다. 전시관 1층의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놓여있다.

출처:위키백과

백범김구기념관과 준공석


"효창공원 정이품송 자목"


"이봉창의사상"


[의열사(義烈祠)]

이곳은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동녕 · 김구 · 조성환 ·차리석 · 이봉창· 윤봉길 · 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7위선열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 추모 제전을 지낸 이래 계속 있었으며, 2011년부터는 전통 제례 방식을 따라 임시 정부 수립일(4월 11일)이나 환국일(11월 23일) 즈음에 '효창원 7위 선열 의열사 제전' 을 거행하고 있다.

그동안 의열사를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애국 애족의 정신을 기르도록 2016년 5월부터 상시로 개방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 4월 11일로 변경 (2019년)
임정요인
이동녕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외2회, 초대주석 외 3회
김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조성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
차리석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

삼의사
이봉창 : 일본 동경에서 일왕에게 폭탄투척 의거
윤봉길 :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에게 폭탄투척 의거
백정기 :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 상해 육삼정 의거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의 묘(墓) The Tomb of Kim Koo]

이 곳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주석(主席)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묘역(墓域)이다.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배웠고, 조선왕조의 부패에 항거하여동학(東學)에 참가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국모(母)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土田亮)를 교훈적으로 처단하여 이 나라에 충절(忠)이 있음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이로 인해 인천(仁川)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약(勒約)되자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교육 · 강연등의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는 안악사건(安岳事件)을 꾸며 다시 투옥,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警務局長)과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령(國務領)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이봉창(李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조국광복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 선생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고 좌우합작(左右合作)운동에 노력하였으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武裝鬪爭)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하여 신탁통치(治)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소美·蘇) 등 강대국의 한국 분할 정책에 맞섰다.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것이 곧 민족분열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가져올 것임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남북협상(南北)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 ·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흉한(漢)에 의해 쓰러지니,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國葬)으로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

1924년 중국에서 먼저 돌아가신 부인 최준례 여사(崔遵禮 女史)와 1999년 4월 12일 합장(葬)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


[백범 김구 좌상]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신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좌상이다.

[보물 김구 서명문 태극기 (金九 署名文 太極旗)]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와 서명을 써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미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 김구 서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강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 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ㆍ인력ㆍ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출처:문화제청

중앙홀 백범 김구 좌상과 보물 김구 서명문 태극기(천안 독랍기념관 소장)


"계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상징홀 연보와 초상화


[유년기]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창암(昌巖)이었다. 어린 시절 김구는 유난스런 개구쟁이였지만, 아홉 살 때부터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열두 살에는 신분차별의 부당함을 겪고 양반이 되고자 본격적인 과거공부를 하였다. 열일곱 살에 황해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관직을 사고파는 현실을 보고 실망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고자 했던 뜻을 버렸다. 그 후 관상공부를 하던 김구는 외적인 수양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인 수양에 힘쓰는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기로 하였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마음 좋은 사람"


[동학의병활동]

김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사상에 이끌렸다. 18세가 되던 1893년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 열심히 동학 교리를 공부하는 한편, 활발한 포교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이끌면서 ‘애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4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팔봉접주(八峰接主)에 임명되었다. 그해 9월 황해도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이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서 은둔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엄격한 군율(軍律)로 인근 마을에 피해가 없도록 하여 인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엄정한 군율 시행에 반대하던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부하를 잃고 황해도 진천군 청계동에 있던 안태훈 진사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은거하게 되었다.

청계동에 머물며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유학과 의리의 세계관을 배우고, 판단 실행 계속의 단계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실천철학을 배웠다. 또한 청나라의 사정을 살피고 동지들을 만나보라는 고능선의 권유로 1895년 김형진(金亨鎭)과 함께 청국 시찰을 떠났다.

김구와 김형진은 간도지역의 사정을 살피던 중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거사의 동기를 적은 격문을 배포하고, 1895년 11월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강계성을 공격하였으나, 작전 미숙으로 실패하였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해주성 전투 기록화


"안태훈 진사와 김구의 스승, 고능선"


"김구, 첫 항일투쟁"


[치하포 의거]

김구는 의병활동이 좌절된 후 1895년 겨울, 청나라와의 연합작전을 추진할 생각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평양(平壤)을 거쳐 안주(安州)에 도착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올랐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주막에서 김구는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발견하였다. 김구는 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三浦]이거나 공범(共犯)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는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그를 처단하였다.

주막 벽에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써 붙이면서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감리서로 옮겨졌다.

감옥에 투옥된 김구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애국정신을 일깨웠고, 자신은 신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의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시급한 과제는 일본인 몇 명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이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김구가 탈옥한 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어머니 곽낙원]

곽낙원(郭樂園,1859-1939) 여사는 겨레의 큰 스승 김구를 낳고 기른 어머니이다, 김구에게 어머니는 큰 스승이었다.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곽낙원은 대범하고 강인했다. 아들이 세 차례에 걸쳐 투옥되었을 때,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아들을 찾아가 면회하며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김구는 "저같이 씩씩한 기절(基節)을 가지신 어머니께서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며, 어머니의 강인함에 탄복하면서 “참 놀라운 어른"이라고 했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곽낙원은 1924년 며느리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두 손자를 키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른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도 하였다. 부인들이 생일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생일 차릴 돈을 달라고 하여, 그 돈으로 권총을 사 준 일도 있으며, 아들은 물론이고,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잘못하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각지로 옮겨 다니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다가, 1939년 81세로 층칭[重慶]에서 생을 마쳤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는 환국 후 어머니의 동상을 만들어 모시고자 했다. 감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여 얻은 찬밥을 가지고 오시던 어머니 모습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인천감옥으로 가는 길에 세워 ‘어머니 이 뜻대로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려는 뜻도 있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어머니 곽낙원 동상과 건국훈장국장


[교육운동·신민회 활동]

김구는 당시 신교육을 이끌고 있던 기독교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교육계몽운동에 나섰다. 김구는 최광옥(崔光玉) 등과 교류하며 황해도 일대에서 장연(長連)에 봉양학교(鳳陽學校), 광진학교(廣進學校), 종산(鍾山)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로, 1909년에는 재령(載寧)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의 학무총감에 선임되었으며, 황해도 지역을 돌며 순회 강연회와 환등회를 개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진남포 엡윗청년회(Epworth 靑年會)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이동녕(李東寧)·전덕기(全德基)·이준(李寯) 등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청원하는 상소와 반대시위 집회를 주도하였다.

이후 김구는 구국운동기 대표적인 항일민족단체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의로 결성된 비밀결사로 국내에서 다양한 구국계몽운동을 펼치는 한편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김구는 1910년 11월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열린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비밀회합에 황해도지역 자금모금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일찍이 간도지역을 순회하면서 취득한 김구의 정보를 바탕으로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후보지역을 선정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營)을 선발대로 파견하였다. 김구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군자금 모금임무를 띠고 활동하던 증, 1911년 '안악사건(安岳事件)'과'양기탁보안법사건(梁起鐸保安法事件)'으로 4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구국운동]

김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창암(昌巖)이었다.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 1898년(23세)에 치하포의거로 투옥된 인천감리서를 빠져나온 후 원종(圓宗;法名). 김두래(金斗來) 등의 이름을 잠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성태영과 유완무 등의 동지를 만나 그들의 제안으로 1900(25세) 때 이름을 거북이 ‘구(龜)’ 로 바꾸었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고통 받으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결의로, 1914년(39세)에 ‘일제의 호적[倭民籍]에서’ ‘이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구(九)’로, 호(號)를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도 애국심이 자신만큼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 시기(1919~1932)]

김구는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고 있었다.
김구는 서대문감옥에 있을 때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교민보호와 임시정부를 지키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김구는 내무총장 등 국무위원으로, 그리고 행정수반인 국무령과 주석으로 27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후 1928년부터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범일지』의 상권은 고국에 있는 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형식으로 집안의 내력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중심으로 쓴 글이고, 하권은 그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의열 투쟁, 즉 이봉창(李奉昌) 의사,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 직후 중국 내륙으로의 피신생활과 해방되기까지의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보물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白凡逸志一九二九年(上卷)一九四三年(下卷)) Baekbeom ilji (Diary of Kim Gu), Volumes 1 (1929) and 2 (1943)]

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자료]

This book is the autobiography of Kim Gu (1876-1949), who was a politician and an activist who fought for Korean independe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t consists of two volumes. At 17, he applied for the highest-level national examinatio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but failed. Later, he was introduced to Donghak, an academic movement in Korean Neo-Confucianism; he became the district leader of the Donghak Peasant Army at the age of 19, and they attacked Haeju Fortress. At the age of 21, he participated in a revolt to avenge the Empress’ death but was captured. He escaped from prison and went to Magoksa Temple in Gongju to become a monk. After the Eulsa Treaty of 1905, which put Korea’s foreign affairs under Japanese administration, he devoted himself to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and engaged in patriotic deeds carried out by An Jung-geun and An Myeong-geun. Immediately aft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he sought asylum in Shanghai. He became the first Police Bureau Director and the President of Internal Affairs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26, he was appointed Cabinet President. In 1939, he became the Premi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following year, he organized the Korean Liberation Army and formed the Anti-Japanese Military Army. In 1941, he declared war against Japan.

The first volume of this diary was written in 1929 when he was 53 years old. It reflects on his involvement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hich lasted for one year in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It is composed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his two sons, Kim In and Kim Sin, in both Korean and Chinese characters. The first volume is organized in the following order: My Home and Childhood; My Thorny Young Age; Roving Journey, and; Sacrificing Myself for the People. The second volume was written in 1932 when he moved from Shanghai to Junggyeong after the two anti-Japanese movements by the Korean Patriotic Legion led by Kim Gu. The contents of this volume record the history of struggle for national independence under the titles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Shanghai” and “Gijeok janggang mallipung (Miracle fierce wind from a distance from Yangtze River).” The writing titled “My Desire” describes well his national ideology for Korea’s complete independence.

Baekbeom ilji (Diary of Kim Gu) has been published by his son Kim Sin under the sponsorship of the Korean History Institute for the first time on December 15, 1947. To date, 10 editions of this book have been published at home and abroad. This original copy, written by Kim Gu during his duty 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is very valuable as historical data in study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and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출처:문화재청


[한인애국단]

1930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결성한 것으로, 일제 요인에 대한 암살과 식민통치기구의 파괴를 위한 특무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김구는 경무국장 시절부터 많은 청년들과 함께 활동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후 청년들을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미주 동포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하고 폭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제는 만주를 점령한 데 이어 중국의 화북지역을 침략하고 있었다. 작전은 이러한 일제의 침략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1932년 1월 이봉창으로 하여금 도쿄에서 일왕을 처단하는 의거를, 4월에는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결행하였다.

이후에도 이덕주·유진식을 국내로 보내 조선총독을 암살하고, 유상근·최흥식을 뤼순[旅順]으로 보내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려는 시도 등을 계획 추진하였으나, 결행 직전에 좌절되기도 하였다.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과 더불어 의열 투쟁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통해 침체되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가 되살아났고,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일제의 침략에 무력했던 중국인들에게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장제스[蔣介石]는 김구를 불러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시기(1932~1939)]

김구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나 피신생활을 하기 위해 임시정부에서 잠시 물러나 있으면서도 임시정부의 조직정비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3년 5월 난징[南京]에서 중국 국민당정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인청년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는데 합의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였다. 또한 난징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청년을 파견하여 군사간부로 육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주요 인적자원이 되었다.

독립운동단체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가 존폐위기에 닥치자, 김구는 1935년 이동녕 등과 자싱[嘉興] 난후[南湖]의 선상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임시정부를 개편하였다. 또한 임시정보를 옹호할 여당조직으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김구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결집에 착수하여, 1937년 6월 민족주의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조직하고, 다른 단체와도 통합을 시도하였다. 1938년 5월에는 창사(長沙)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논의하던 중 저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여,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 후 계속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1939년 좌파계열의 김원봉(金元鳳)과 좌우합작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2년에 좌우합작을 이루게 되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추모공간]

효창원 애국선열묘역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7분의 선열이 모셔져 있다. 1946년 김구 선생이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모셔와 안장하였고, 같이 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를 조성하여, 후일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안장하고자 하였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이동녕·차리석·조성환)의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추모공간에서 보이는 묘소는 1949년 통일의 꿈을 마음에 품은 채 돌아가신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이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 시기(1940~1945)]

김구는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를 당·정·군의 체제로 개편하였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주석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석, 광복군 통수권자를 겸임하게 되어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운영되었다.

충칭에 정착한 후 좌익진영 독립운동 세력과 통합도 실현하였다. 1941년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한 이래,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였고,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 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익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다.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 공포하여 임시정부의 광복 후 민족국가건설계획 및 독립운동 지도이념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일제와 직접적 항전을 추진해 나갔다.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2월에는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전후(戰後)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이었고, 중국·영국·미국 등 연합군과 연계를 맺으며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동원하여 직접 국내로 진입한다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의 OSS와 연계하여 광복군 대원들에게 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옌안[延安]의 조선의용군에게 압록강에서 만나 국내로 진입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미국 측에는 임시정부가 제주도를 거점으로 삼아 국내로 진입할 테니 그곳을 탈환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OSS 책임자와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킨다는 군사작전에 합의하고 시안[西安]에 들렀다가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선전포고, 자주독립선언"


1943년 7월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완전독립을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수락하고,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박학성 그림


[장제스의 글]

1969년 서울 남산에 김구의 동상 건립을 기념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보낸 글


[한국광복군]

김구는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서둘렀다. 군사특파단을 시안[西安]에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도록 하였고, 미주교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그리고 중국정부를 상대로 군대편성에 대한 양해와 협력을 요구하였다. 미주교포들이 보내 온 자금을 바탕으로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중국대륙 각처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을 비롯, 1943년 8월 인도 미얀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1945년 7월까지 2년여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에 합의하고 제2지대와 제3지대가 시안과 푸양[阜陽]에서 각각 OSS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 4일 제1기생 훈련이 완료되자 김구는 도노반(William J. Donovan) 소장과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구는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모든일이 허사가 되고, 승전국으로 참전하지 못하여 국제적 발언권이 약할 것을 걱정하였다. 1945년 11월 환국하여 보게 된 국내 현실은 바로 걱정한 그대로였다.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였고, 이어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환국"


[자주·통일 국가 수립]

김구는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하며, 1948년 1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유엔의 협조 하에 남북회담에 의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한 2월에는 남북한 두개의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의 실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1948년 2월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하였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북행길에 올랐다.

4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남북요인회담에서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의, 공동 발표하였으며, 이 공동성명 서는 이후 통일의 지표가 되었다. 이러한 회의 결과에 만족한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1948년 6월 북한에서 정부 수립의 의사를 밝히며 동의를 요청하자, 김구는 이를 단호히 반대하면서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7월 김규식과 통일독립촉성회(統一獨立促成會)를 조직하고, “친미·친소보다 우리 조국과 친하여 통일단결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자, 분단과 이에 의한 동족상잔을 예상한 김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조국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우리 3천만 절대다수의 유일한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라 밝히며 통일의 염원을 재확인하였고, 자주적 민족정신에 입각한 통일국가 건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38선의 김구]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완전 자주통일을 위하여 제의한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는 남븍협상에서 통일을 위한 원칙에 합의하였다.


[서거와 추모]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미국은 미군정을 확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친일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권력 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심해져 갔다.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지만. 김구는 지속적으로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과 자주적 평화 통일 운동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서거 후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뇌부에서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차원의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안두희는 배후조직의 하수인에 불과했으며, 1차적인 배후조직은 당시의 군 수뇌부였다. 또한 이승만 역시 정권차원의 범죄라는 점에서 도의적 책임이 있으며, 암살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이를 숨기기 위해 직접 개입한 것이 1995년 국회에서 채택된 「백범김구암살진상조사보고서」에서 확인되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국가등록문화재 백범 김구 혈의(血衣)]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1949.6.26 경교장에서 총격으로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의복류로 조끼적삼(1점), 저고리(1점), 조끼(1점), 개량속고의(1점), 바지(1점), 대님(2점), 양말(2점) 및 개량토시(1점) 등 일괄 8종 10점이다. 혈흔이 남아 있으며 특히 조끼적삼과 저고리에는 탄흔이 있어 서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유물로 역사적·상징적 가치가 매우 크다. 혈흔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조끼적삼과 저고리 및 조끼는 왼쪽 어깨부위가 절개된 상태이며, 개량속고의(전통적인 袴衣와 달리 개량된 속바지)와 바지 및 대님은 상의와 마찬가지로 명주로 만들어졌다. 그 외 갈색 양말과 개량토시(전통적인 吐手와 달리 옷소매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근대기부터 사용한 덧소매형 토시)가 있으며, 조끼에 달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은단추도 별도 보관되어 있다.

[영문 설명]

This is a set of clothes of Kim Gu (1876-1949) which he wore when he was killed by a pistol-shooting at Gyeonggyojang House on June 26, 1940. They are a sleeved vest(1), a Korean-style coat(1), a vest(1), an improved man’s short trousers(1), a piece of Korean-style trousers(1), two pieces of ankle bands(2), two pieces of socks(2), and an improved wristlets(1), etc. They are 8 kinds and 10 items. The clothes are blood-stained and the sleeved vest, the vest and the Korean-style coat are bullet-marked and these clothes are relics which verify the time when he was killed vividly and has the great historical and symbolic value. The shoulder parts of the blood-stained sleeved vest, the Korean-style coat and the vest are cut open. The improved man’s short trousers, Korean style trousers and the ankle bands are made of silk like his upper garment. The socks of brown color and the improved wristlets have been kept. And several silver-buttons which seem to have been fixed on the vest are separately kept in custody.

출처:문화재청


"울고 다시 웁니다"


[국가등록문화재 백범 김구 회중시계 (白凡 金九 懷中時計) Kim Gu's Pocket Watch]

윤봉길(1908~1932)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1932.4.26) 직후에 구입하여 간직하다 거사(擧事)를 위해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 김구선생의 시계와 맞바꾼 것으로, 윤봉길의사의 유품이면서 김구선생의 유품이기도 하며, 거사에 임한 두 분의 애국·독립정신을 헤아릴만한 유물로서 상징적 가치가 크다. 이 금색 회중시계(懷中時計)는 Waltham사에서 만든 것으로 시계줄 끝에 작은 나침반이 달려 있으며, 하트형의 꽃무늬가 은도금되어 있는 덮개를 열면 12방위가 한자로 표시되어 있다. < 규격 : 직경 45mm, 재료 : 금속, 제작시기 : 1900년대 초반(1932년 이전) >

[영문 설명]

Patriot Yun Bong-gil (1908-1932), purchased this watch shortly after he had the Oath Ceremony for Joining the Korean Patriotic Corps (April 26, 1932) and on the day when he was heading for Honggu Park for a revolt, he exchanged this watch with Kim Gu’s. This watch can be said to be Kim Gu’s relics as well as Yun Bong-gil’s through which we can fathom these two people’s patriotism and independent spirit, and its symbolic value is very high. The golden pocket watch was made by Waltham Company in America and at the end of the watch chain, a small-sized compass was adhered and beneath the heart-formed and silver-plated cover Chinese characters of 12 directions are designated.

출처:문화재청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2-2) (尹奉吉義士 遺品(1972-2)) Hoejungsigye]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봉길의사 유품 내역

1.회중시계 : 상해(上海)의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떠나는 날 아침 김구(金九) 선생과 바꾸어 찬 낡은 시계인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몸에 지닌 유품(遺品)이다 지름 5㎝, 줄길이 30㎝, 두께 1㎝, 스위스제(製)이다.

출처:문화재청


[백범일지의 출간]

『백범일지(白凡逸志)』는 1947년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판되었다. 현재까지 원본의 내용을 중심으로 약 50~60여 종, 쉽게 읽을 수 있는 위인전 형식으로 약 40~50여종이 출판되었으며, 중국어, 일어, 영어, 독일어, 몽골어판 등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김구에 대한 연구서들도 1990년 이후 발간되기 시작하여 약 20여종이 출판되고 있고, 각 출판사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발행한 교과서에도 김구의 사상, 통일운동, 어록 등이 수록되어져 약 12종이 발간되어 있다.

출처:백범김구기념관


"백범 김구 데스마스크"


"백범 김구 흉상과 나의 소원"

백범 김구선생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민주.통일 조국의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시다. 박승구 작(194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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