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1. 06:28ㆍ바롱이의 쪽지/강원도
[팔석정의 유래]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재임시 영동지방을 두루 살핀 후 자연경치에 탄복하여 영서지방에는 이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없겠느냐는 생각에서 영서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던 중 이곳 봉평면 평촌리(당시는 이 지방이 강릉부 소속)에 이르렀다. 아담하면서도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정사도 잊은 채 8일을 신선처럼 자유로이 노닐 며 경치를 즐기다가 , 팔일정이란 정자를 세우게하고 1년에 세번씩 [ (춘화), (하방), (추국)] 찾아와 사상을 가다듬었다. 그는 임기가 끝나 고성부사로 전임하게 되자 다시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하여 집 한 채를 세운 후 샘이 깊은 우물을 파놓고(봉래고정이라 함) 주변의 바위 여덟 군데에 글을 새겨 놓았다하여 팔석정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봉래(蓬萊) :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 혹은 금강산
방장(方丈) :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 혹은 지리산
영주(瀛洲) :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 혹은 한라산
석대투간(石臺投竿) : 낚시하기에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淸蓮) :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돌로 만든 연못
석실한수(石室閑睡) : 바위가 방처럼 둘러싸여 낮잠을 즐기기 좋은 곳
석요도약(石搖跳躍) : 뛰어 오르기 좋은 바위
석평위기(石坪圍碁) : 바위가 평평하여 장기 두던 곳이라
"팔석정"
"팔석정"
"수평으로 자란 소나무와 계곡물"
[봉산서재]
봉산서재는 이 고을 유생들이 봉산(이 마을의 뒷산, 덕봉이라고도 함)에서 율곡이 잉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06년 건립하였는데, 그 배경은 이러하다.
1890년대 조선을 놓고 열강들의 패권 쟁탈전이 벌어지자 홍재홍 등 이곳의 유생들은 계를 조직하여 나라가 어려운 지경일수록 애국심과 윤리와 도덕성을 지킬 것을 강건히 다짐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고향이 율곡과 같은 성현이 잉태된 곳임을 상기해 자긍심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하여 1905년 판관대를 중심으로 10리 땅을 하사받고, 유생들이 성금을 모아 1906년 이이의 영정을 모신 봉산서재를 지었으며, 봄 가을로 제사도 지냈다. 이렇게 애써 지어진 기념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그와 같은 윤리와 도덕이 불필요한 듯 관리를 하지 않아 매우 볼썽 사납게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68년 지방민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기실 봉산서재에서 주목할 만한 유물이나 건물은 없지만, 동산 위에 높직하게 서 있는 봉산서재의 주변 산수가 아름답다. 산과 물이 서로 감고 돈다고 하는 산태극 수태극 형상으로, 서재 뒤로는 낮은 산들이 둘러앉아 있고, 앞으로는 서쪽 멀리 홍정산에서 발원한 홍정천이 흐른다. 봉산서재로 들어서는 계단 입구의 훌쩍 키 큰 소나무도 퍽 인상적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봉산서재, 강수재 현판"
"율곡 이이, 이항로 선생 영정"
[율곡 이이 잉태에 얽힌 전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판관으로 재직할 때 사임당을 비롯한 식솔들은 산수가 수려한 판관대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원수가 여가를 틈타 인천에서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날이 저물어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는데, 그 주막의 여주인은 그날 밤 용이 가득히 안겨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주모는 그것을 하늘이 점지해주는 비범한 인물을 낳을 잉태 꿈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주막의 손님은 이원수뿐이었다. 주모는 이원수의 얼굴에 서린 기색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하룻밤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원수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무렵 사임당 신씨는 강릉의 친척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역시 용이 품에 안겨드는 꿈을 꾸었다.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대화면에서 주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친 이원수도 그날 밤이 깊어 도착하였다. 바로 이날 밤 율곡이 잉태된 것이다.
며칠 집에 머문 이원수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주막에 들러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모가 거절하였다. “하룻밤 모시기로 했던 것은 신이 점지한 영재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어르신의 얼굴에는 전날의 비범한 기가 없으니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인물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허나 후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원수는 주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모에게 혹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느냐 물었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라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아들 생각에 주모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몇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험상궂은 중이 시주를 청하며 어린 율곡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을 떠올리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천 그루를 시주하면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원수는 ‘옳다’ 하며 쾌히 승낙하고 뒤뜰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하였다. 그러나 밤나무는 한 그루가 모자랐다. 한 그루가 자라지 못하고 썩어버렸던 것이다.
이원수가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중은 호랑이로 변해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나무가 생겼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판관대]
봉평면 창동리(현: 평촌리) 길가에는 까만 비석 몸돌에 자연석 지붕돌을 얹어놓은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판관대는 율곡 이이가 잉태된 곳으로, 조선 중종 때 수운판관을 지낸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의 직책에서 이름을 따 ‘이판관의 집터’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율곡의 부모가 당시 무슨 연고로 이곳에서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율곡이 지은 사임당의 행장으로 보아 사임당이 얼마 동안은 판관대라 부르는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죽헌이 율곡의 탄생지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흔치 않게 잉태지가 유적으로 남게 된 데에는 율곡의 높은 지명도말고도 범상치 않은 잉태설화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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