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불교문화유산의 향유, 평창 월정사 성보박물관

2022. 8. 18. 05:33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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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불교문화유산을 향유하다"

[평창 월정사 성보박물관]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자연적 혹인 인위적인 훼손에 노출되어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에 속한 약 60여개의 전통사찰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들을 도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생물학적·화학적인 유물의 오염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존관리하며, 문화재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축적시켜 일반인과 학계에 성보문화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공유함과 동시에 관람객 및 불교 신도들에게 유물전시를 통하여 보다 열린 문화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건립되었습니다. 

오대산 월정사에는 다수의 문화재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화재와 도난 등으로 많은 유물이 유실되어 사라졌습니다. 이에 남은 문화재들을 보호하고 전시하기 위해 1974년 만화대선사께서 월정사 경내에 진열장과 보관시설을 갖춘 18평 규모의 '보장각(寶藏閣)'을 건립하신 것이 월정사 성보박물관의 기원입니다. 

20여년이 지나고 성보문화재 보존과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당시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에 의해 월정사 성보박물관 건립이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에 1995년 건립추진안이 본사 종무회의에서 결의되었습니다. 이듬해 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에 약 860㎡ 규모의 박물관이 완공되어 1999년 10월 13일에 개관을 한 뒤,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 후 소장품들이 늘어나고 전시공간과 유물수장 공간이 부족하여 새로운 박물관을 월정사 외부에 건립하기로 하고 2013년부터 공사를 시작, 2016년에 약 2700㎡ 규모의 지하 2층, 지상 2층 건물로 완공되어 2017년 10월부터 공개하고 있습니다. 

신축한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지상 2층, 지하 2층으로 이루어진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총 면적은 2700㎡ 로 1층과 2층에는 전시공간을, 지하에는 관장실과 학예연구실, 수장고, 창고, 기계실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국보 제 48-2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제 292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2건의 국보와 5건의 보물 등 총 39건의 지정문화재와 4,000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있습니다. 

특히 수장고 시설은 항온항습기를 24시간 가동하여 급격한 온도변화에 따른 유물의 손상을 최소화 하였습니다. 이에 덧붙여 전시진열장들과 박물관 실내공간에도 공조시설을 설치하여 전시중인 유물의 손상이 없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또한 최신식 보안장치를 시설하여 유물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인 월정사는 한국의 4대성지 중 하나로 우리나라 전통문화가 가득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월정사의 모든 재적스님들과 성보박물관의 직원들은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세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우리의 소중한 불교문화유산을 향유하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출처:월정사성보박물관


"사바세계에서 정토로"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신라의 자장율사가 최초로 전해 온 이래 성행하였다. 강원도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으로 여겨졌으며, 역사 속에서 불교성지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제품과 오대산의 문수보살


"보천과 효명태자의 문수보살 친견"

보천과 효명태자는 신라 신문왕의 아들로 속세를 벗어나고자 오대산에 암자를 지어 수도하며 매일 아침 1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였다. 이후 신하들은 오대산으로 찾아와 보천태자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보천태자는 왕위를 거절하고 대신 효명태자를 왕으로 옹립하게 되는데 바로 성덕왕이다.


"목조문수동자좌상과 세조의 문수동자 친견"

이 도판은 세조의 문수보살 친견 설화를 표현한 것이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았다. 이후 치료를 위해 상원사로 향하던 중 계곡에서 몸을 씻다가 동자를 만나게 되고 피부병이 완전히 나았다. 자신이 만난 동자가 문수동자이었음에 감동한 세조는 문수동자상을 상원사에 조성하게 했다.

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제품과 세조의 문수동자 친견 도판


[국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Documents of Sangwonsa Temple, Pyeongchang]

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등이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영문 설명]

This is a book of two volumes, containing letters written by King Sejo and the replies by Hyegakjonja, Sinmi (a reverend monk, Royal Mentor). Upon hearing that Sinmi was rebuilding Sangwonsa Temple in Odaesan Mountain, wishing for the King's long life, King Sejo sent letters together with gifts of rice, cotton, hemp cloth and steel, and Sinmi wrote back to the King after receiving the royal gifts.

One of the two volumes, written in pure Chinese characters, features different sugyeols (a form of signature used in Joseon Dynasty before chops were widely accepted in late 19th century) of Sinmi such as 'Sinmi', 'Hagyeol' and 'Hakjo' along with sugyeols and official seals of King Sejo and the crown prince.

The other volume has the gwonseonmun (encouraging letter) both in Chinese characters and a translated version in Hangeul, with sugyeol and an official seal at the end. This book is an invaluable material for studies in Old Korean, offering a glimps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royal household and Buddhist scholars.

출처:문화재청


"국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보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Excavated Relics from the Wooden Seated Child Manjusri of Sangwonsa Temple, Pyeongchang]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상(국보)에서 1984 7 불상의 유래를 밝힐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된 유물이다.

발원문은 불상을 만들게 이유와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후대에 보수한 기록도 적어 놓고 있다. 첫번째 발원문은 세조 12(1466)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4㎝의 낱장으로 되었고,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를 썼다. 또다른 발원문은 1599년에 2구의 문수동자상과 16구의 나한상 등에 금칠을 새로 하고 고쳤다는 내용이다. 크기는 세로 34.6, 가로29.1㎝의 낱장으로 되었고 역시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로 썼다.

전적류는 모두 13종으로 백지묵서제진언, 대방광불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5, 원각경 2, 육경합부 3종이 발견되었다.

백지묵서제진언은 불교의 가르침 66가지를 범어로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41.8, 가로 679.3㎝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 60 가운데 28 해당하며 간행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이다.

오대진언은 다섯가지의 다라니 진언(眞言: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 ) 범어, 한글, 한자순으로 적고 있다. 성종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성종 16(1485)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우고 닥종이에 찍어낸 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묘법연화경 1-3, 4-7 2권의 책으로 되었고,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8㎝이다. 작은 글자로 아주 정교하게 새겨 고려 정종 1(1399) 간행한 것으로 해린(海隣) 1년에 걸쳐 새긴 것이며 인쇄 상태로 판을 새기고 한참 후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1-7 병풍처럼 펼쳐서 있는 형태이며 모두 10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8.5㎝이다. 태종 4(1404) 간행된 목판본으로 표지는 검푸른 색이고 제목은 금색으로 쓰여있다. 묘법연화경 6-7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이다. 세조 간행된 을해자본으로 인쇄직후 불상에 넣은 매우 깨끗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1-3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세로 27.6, 가로 16.6㎝이다. 불상에 넣기 전에 읽으면서 달아놓은 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에 복장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세조 11(1465) 간행된 목판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7, 가로 18.5㎝이다.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세우고 효령대군에게 명하여 교정한 원각경을 정란종(鄭蘭宗) 것으로 을유자(乙酉字) 찍은 것이다. 을유자본은 을유년에 만든 활자로 찍은 책을 말하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고 부르며, 책은 현재 전하는 을유자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이다. 또다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권상·· 3권이 세로 25.1, 가로 16.5㎝의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다. 책은 전에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명종 19(1564) 신흥사(臣興寺)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세로 29.3, 가로 17.3 크기의 육경합부는 1440년에 영제암에서 판각한 목판을 인수대비가 성종 3(1472) 대대적으로 찍어낸 가운데 하나이다. 화암사에서 성종 19(1488) 다시 새긴 다른 육경합부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세로 26.6, 가로 15.7㎝이다. 진안(鎭安) 중대사(中臺寺)에서 세조∼명종년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육경합부는 크기가 세로 26.4, 가로 16.3㎝인데 상원사 복장유물 보존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

당시 상류계층에서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주 적삼 1점과 생명주 적삼 1점은 불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사람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다른 유물들과 같이 넣은 것으로 보인다. 황색 보자기는 불상에 들어갈 유물들을 싸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밖에도 구슬 3개와 사리가 같이 발견되었다.

위의 유물 발원문은 상원사문수동자상 여러 ·보살의 조성연대를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전적 제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며, 그밖에 활자본과 목판본은 나름대로의 서지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복식류는 조선 전기의 의류로 현재까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의숙공주 발원문


[오대진언]

다섯가지의 다라니 진언(眞言: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 글)을 범어, 한글, 한자순으로 적고 있다. 성종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성종 16년(1485)에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우고 닥종이에 찍어낸 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백지묵서제진언]

불교의 가르침 66가지를 범어로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41.8, 가로 679.3㎝이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세조 11년(1465)에 간행된 목판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7, 가로 18.5㎝이다.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세우고   효령대군에게 명하여 교정한 원각경을 정란종(鄭蘭宗)이  것으로 을유자(乙酉字)로 찍은 것이다. 을유자본은 을유년에 만든 활자로 찍은 책을 말하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고 부르며,  책은 현재 전하는 을유자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이다. 또다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권상·중·하 3권이 세로 25.1, 가로 16.5㎝의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다.  책은 전에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명종 19년(1564)에 신흥사(臣興寺)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묘법연화경]

권1-3, 4-7은 2권의 책으로 되었고,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8㎝이다. 작은 글자로 아주 정교하게 새겨 고려 정종 1년(1399)에 간행한 것으로 해린(海隣)이 1년에 걸쳐 새긴 것이며 인쇄 상태로   판을 새기고 한참 후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권1-7은 병풍처럼 펼쳐서   있는 형태이며 모두 10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8.5㎝이다. 태종 4년(1404)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표지는 검푸른 색이고 제목은 금색으로 쓰여있다. 묘법연화경 권6-7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이다. 세조  간행된 을해자본으로 인쇄직후 불상에 넣은  매우 깨끗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권1-3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세로 27.6, 가로 16.6㎝이다. 불상에 넣기 전에 읽으면서 달아놓은 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에 복장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불화엄경]

화엄경 60 가운데 권28에 해당하며 간행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이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세조대의 회장저고리 世祖代의 回裝저고리(복제본)]

세조대의 회장저고리는 1975년 상원사 문수동자좌상 개금 당시 불상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불상이 조성되던 15세기에 넣은 의복으로 추정된다. 

저고리 뒤쪽에는 '장씨소대(長氏小對)'라는 글씨가 있어 저고리의 주인이 세조의 후궁 중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깃과 끝동, 섶과 옷고름 등에 짙은 배색을 한 회장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저고리로 각이 진 깃, 직선의 소매, 짧고 좁은 옷고름 등 조선 초기 저고리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명주 적삼 明紬赤衫]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 단삼單衫이라고도 한다. 명주는 섬세하고 치밀하며, 고름은 가늘고 짧으며 저고리의 길이가 둔부를 가릴 정도로 긴 것이 특징이다. 이 명주적삼에는 이물질이 묻어 있는데, 세조가 앓던 피부병과 관련하여 피고름의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불심을 빌어 병을 치유하고자 했던 의지와 불상조성의 공덕을 느낄 수 있다.

세조대의 회장저고리 복제본(사진 위),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명주적삼 복제본(사진 아래)


[강원도 유형문화재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월정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경판에서 직접 찍어온 것이다. 조선 고종 2년(1865)에 찍어내어 월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84.6㎝, 세로 24㎝이고 한지에 인쇄하였다. 판의 끝에는 경전의 이름과 권수의 간행 차례가 기록되어 있다. 천자문 순서대로 새겨 놓았는데  1,511부 6,802권 81,137판으로 되어있다. 

고려 때는 물론이고 조선초에도 인쇄되었으나 전부 남아있는 것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대장경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인쇄한 2부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 (原州 龜龍寺 三藏菩薩圖) Buddhist Painting of Guryongsa Temple, Wonju (Three Bodhisattvas)]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는 1727년에 화승 白基와 英輝가 조성하여 치악산 구룡사에 봉안했던 삼장보살도로서,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五種梵音集」 등 수륙재의식집에 의거하여 天藏菩薩, 持地菩薩, 地藏菩薩 등 세 보살의 會上을 묘사하였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 등이 들어있는 복장낭도 잘 남아있는데, 화기에 기록된 제작 시기, 연화질 등이 일치한다. 가로와 세로로 접힌 자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안료가 박락되기는 했지만, 밝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노란색과 파란색 등 중간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감, 균형잡힌 신체에 둥근 얼굴,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가늘고 긴 코, 작고 꽉 다문 입술 등 18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수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 靈駕薦度 및 追善供養을 위한 수륙재의식 때 봉안되었던 작품으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영문 설명]

This painting of three Bodhisattvas, created in 1727 by two monk-painters, Baekgi and Yeonghwi, to be enshrined in Guryongsa Temple at Chiaksan Mountain, depict a meeting of three bodhisattvas, Cheonjang, Jiji and Jijang, on the basis of the record in the collection of Liberation Rites of Water and Land. The painting was discovered together with a written prayer, a container for offerings, and a dharani, which confirm the production date and the list of participants recorded in the postscript on the painting. The painting is regarded as an important material concerning various memorial services held for the deceased at Buddhist temples during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출처:문화재청


"삼척 영은사 괘불, 보물 월장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은제도금여래입상"


"국보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먹거리"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먹거리

"천 년 숲길 끝, 부처를 향한 공양" [국보 제48-1호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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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

상원사 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은 문수보살상의 조성연대가 1661년(현종 2)임을 밝히는 발원문과 전적, 후령통 등 많은 유물을 동반하고 있다. 특히 2017년 보존처리 사업을 진행하던 중 그동안 개봉되지 않았던 후령통 안에서 비단에 쌓여진 보병과 직물류,곡식, 보석류 등이 다수 발견되어 상원사 문수동자상처럼 왕실과 연계될 수 있는 복장물의 특색을 보이는 귀중한 유물이다.


"보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유물"


[사리신앙 舍利信仰]

석가모니불 다비(화장) 후 나온 사리를 불사리佛舍利 혹은 진신사리라 하여 법신法身으로 여기고 예경하였다. 열반에 든 석가모니의 사리는8개 부족에 분배되었고, 그 중 500과가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불사리가 신앙으로 인식된 것은 BC 3세기 중엽 아쇼카왕 때부터였다. 아쇼카왕은 8개의 사리탑 가운데 1개를 제외한 나머지 탑을 열어 전국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토록 하였다. 이때 8만 4천의 불사리탑이 건립되었으며 불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사리탑이 건립되고 이를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이루어졌다. 이후 불사리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성보가 되어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한국의 사리신앙]

한국의 법사리 신앙이 성행하게 된 계기는 석가탑에 안치되어 있던「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의한 것으로, 황룡사 9층탑의 재건도 이 경전에 의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반 무렵까지 중국의 영향을 받다가 삼국통일 이후 경전에 의한 법사리 신앙이 발전하면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리신앙으로 전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원사 문수동자좌상의 사리기록]

상원사 문수동자좌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오대산을 친견했을 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 모습을 본떠 조성했으며 세조가 사리를 납입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불상이다. 1984년 복장을 개복하면서 나온 발원문에 따르면 1466년(세조 12)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부모인 왕과 왕비, 세자의 만세기원과 자신들의 득남을 위해 오대산 문수사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그 외 전적 등의 복장유물들과 함께 보주와 사리 각 3과가 함께 발견 되어 조선 초기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진신사리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보 상원사 문수동자좌상 투신 부처님 진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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