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서·남 성벽

2022. 12. 21. 05:20바롱이의 쪽지/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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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복원 서쪽 성벽]

수원 화성은 팔달문을 기준으로 좌우 성벽이 단절되어 있다. 이곳은 팔달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성벽이 팔달문과 이어지는 구간으로 120m의 성벽에 남서적대와 남은구가 있었다. 남서적대는 팔달문에서 서쪽으로 약 49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남동적대와 함께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도로를 넓히기 위해 팔달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사라졌다.

남은구는 남서적대에서 서쪽으로 약 48m 떨어진 곳에 있었다. 팔달산에서 시작된 물길이 성안의 남지 연못을 거쳐 성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 수문으로 성벽 아래에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들었다. 성안에는 5곳의 연못과 2곳의 은구가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지 않았다.


[남치(南雉)]

남치는 남포루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화성에는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지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서치와 마찬가지로 치성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하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 있다.

1)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화성 서쪽 성벽과 팔달문"


[홍난파 노래비 洪蘭坡 童謠碑]

이 노래비는 난파 홍영후(1898~1941)가 태어난 지 7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1968년 건립되었다. 명문에는 화홍문화제가 열린 10월 15일 '수원시민의 날'이 건립일자로 되어있으나 제막식은 23일에 있었다. 앞면에는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 악보가, 뒷면에는 건립 내력이 새겨져 있다.

홍난파는 일본 관립 도쿄음악학교, 도쿄고등음악학원, 미국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를 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으며, 1937년 11월 이후에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봉선화」 「고향의 봄」 「애수의 조선」 등이 있고, 「조선동요백곡집」을 남겼다.

미국 유학 도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검거되었으나, 8월 석방된 뒤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순정의 꽃장사」 등을 작곡하고 지휘자로서 방송을 통해 군국가요를 보급하는 한편, 조선총독부의 관변단체인 조선문예회와 조선음악협회,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 가담하여 일제의 전쟁동원과 황국신민화정책을 선전선동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일제하의 친일반민족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소속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이름과 행적이 수록되어있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서남암문·서남포사(西南暗門·西南舍]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1)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1)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용도(道) ]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잡고 있다.

1) 치성: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


"3.1독립운동기념탑, 대한독립기념비"


[서3치(西三雉)]

서3치는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다. 적대1)와 비슷한 구조는 서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다.

1)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효원의 종"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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