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보종찰, 사적 순천 송광사

2023. 4. 28. 08:45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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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종찰 조계총림"

[사적 순천 송광사 (順天 松廣寺)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송광사국사전’ 등 4점, 보물 27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영문 설명]

Songgwangsa Temple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temples of the country. Following the restoration work carried out under the supervision of Monk Jinul, the temple became a leading temple and produced the sixteen most revered Buddhist monks of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The temple keeps three National Treasures, including Guksajeon Hall of Songgwangsa Temple (National Treasure No. 56), in which the portraits of the revered priests are kept, twelve Treasures, and a hermitage at which the sariras of the revered monks are kept.

출처:문화재청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청량각]

절 아래쪽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다보면 내를 가로지르는 멋진 누다리를 만난다. 송광사의 길을 여는 청량각(淸凉閣)으로, 막상 걸어 지나갈 때는 눈길이 가지 않지만 개울 쪽에서 보면 무지개다리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잠시 앉아 다리쉼하며 송광사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계곡과 숲길"


[불일암]

불일암은 1975년 법정 스님이 봉은사 다래헌에서 내려와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 7세인 고려시대 승려 자정국사(1293~1301)가 창건했던 자정암 폐사지에 건물을 새로 올려 불일암 이라고 명명하고 편액을 걸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의 문하로 출가했다. 7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 거주하며 한글 대장경 역경에 현신하였고, 함석현 등과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의했으며 불교신문사 주필을 지냈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짓고 주석하며 한 달에 한 편의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사찰 수련회의 시금석을 놓았다.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떠날 때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1997년 서울 성북동에 “맑고 향기롭게"로 상징되는 길상사를 창건해 주력하다, 2010년 3월 11일 열반했다. 

저서로는 무소유, 산방 한담, 인도기행,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맑고 향기롭게, 아름다운 마무리 등 다수가 있다. 불일암 경내에는 법정스님이 기거한 요사 2동과 자정국사 부도가 있다.


"제7대 자정국사 부도 묘광탑"


"율원"


[송광사 율원 부도밭]

효봉영각 앞에서 바라보아 왼쪽 산등성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불일암으로 가다보면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대나무가 빽빽하게 장관을 이룬 대숲이 나온다. 이 대숲이 끝나는 곳에 율원과 함께 낮은 돌담장을 둘러친 너른 터에 부도밭이 있다. 보조국사 부도비와 송광사사적비가 제일 위쪽에 나란히 서 있고, 그 아래 크고 작은 부도와 비석 30여 기가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 송광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의 부도이며, 평범한 팔각원당형이거나 석종 형태가 많다.

부도는 전통적으로 산내 각 명당터에 부도를 수호하는 목적의 암자를 지어 보호하였으나,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관리가 소홀하게 되어 독립적으로 부도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자 한곳에 모아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송광사 부도밭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조성되었으며, 경내에서 가장 정갈하고 고요한 곳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율원 대나무숲"


"구산선문"


"탑전"

탑전 적광전과 부도군(조계총림 송광사의 초대방장인 구산스님의 부도탑. 2대 방장 일각 스님의 부도탑등 여러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하마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일주문 (松廣寺一株門)]

종남산 기슭에 있는 송광사는 867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 

출처:문화재청


일주문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송광사 일주문 소맷돌 돌사자]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한 돌사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임경당, 우화루, 침계루]

경내로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계류가 흘러내려가는 쪽으로 임경당(臨鏡堂)이 계류에 두 발을 담근 듯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계류가 흘러오는 우화각 뒤쪽으로는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는 침계루(枕溪樓)가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침계루와 우화각으로 흘러내려오던 계류는 임경당 앞에서 잠깐 고여 임경당의 자태를 비추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어 송광사 계곡 아래쪽으로 흘러간다. 우화각 안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읊은 옛 시인 묵객의 한시가 빽빽이 걸려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임경당]

임경당은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ㅁ자형 건물로, 건물 일부가 계류 쪽으로 돌출되어 계곡에 기둥을 드리우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고향수]

척주각과 세월각 앞에는 깃대처럼 생긴 높이 15m의 고사목이 있다.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라고 하는데,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세월각과 척주당]

일주문을 들어서면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조그맣게 서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 모습에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송광사삼청교및우화각 (松廣寺三淸橋및羽化閣)]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중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삼청교 위에 지어놓은 우화각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든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나가는 쪽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가는 쪽의 지붕이 옆 건물과 가까이 닿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본다.

비록 웅장한 모습은 아니나, 두 유물이 다리역할도 하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도 하는 2중효과를 보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침계루]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아래층 벽체에 환기를 위해 암기와로 모양을 낸 꽃창에 드러난 명랑한 정서가 돋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천왕문]

천왕문은 정면, 측면 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내부에 있는 사천왕상은 순조 6년(1806)에 최종적으로 채색되었다. 사천왕상 앞에는 각기 동방지국천, 남방증장천, 서방광목천, 북방다문천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송광사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종고루]

천왕문을 지나면 먼저 종고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통과해야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천왕문·해탈문·대장전·종고루·법왕문이 대웅보전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모두 대웅보전을 마주보는 일직선상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천왕문을 제외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종고루만이 옛 해탈문이 있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1962년에 재건되었다. 화재가 있기 전 종고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였다고 한다. 종고루 2층에는 사물인 범종·운판·목어·법고가 놓여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한붕화상이 새겨진 감로수"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 건물로, 108평(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크기와 亞자형의 이색적인 건물 평면구조가 눈길을 끈다. 내부의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세 분과 문수·보현·관음·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닫집으로 꾸몄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웅보전 소맷돌 사자상과 지장전]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 당시 현재 지장전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증축하였다. 지장전 옆에는 담장으로 구획된 곳이 있는데, 담 안쪽의 여러 건물들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송광매"


[승보전]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집으로, 중창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1961년 중창되어 내력이 오래지는 않지만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므로 법당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석가여래와 10대 제자 그리고 비구 1,250분을 모시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송광사 3대 명물 비사리구시]

송광사 3대 명물 비사리구시(승보전 처마 밑에는 절 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다는 비사리구시라는 큰 나무 밥통이 있다. 이 비사리구시는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의 싸리나무로 만든 것으로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무무문]

한자성어 ‘대도무문’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누각에는 문이 없다. 네 방향 모두 열려 있다. 대도무문, ‘바른 길을 가는 데 무슨 문(거쳐야 할 것)이 필요할까’라는 뜻이다. 불교사전에서는 대도무문을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정해진 형식이 없어서 언제, 어떤 곳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도달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풀어주고 있다.


[관음전]

관음전은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었던 성수각(聖壽閣)이었다고 한다. 현재 관음전은 1902년 고종의 원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957년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소맷돌을 장식한 돌사자 조각이나 내부를 장식한 민화풍 벽화, 천장에 조각 장엄된 물고기·게·거북이 들을 눈여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관음전은 일반에게 공개된 송광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고풍스럽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順天 松廣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및 腹藏遺物) Wooden Seat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and Excavated Relics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복장되어 있던 저고리와 별도의 백색비단에 적은 발원문을 통해 1662년 궁중나인(宮中內人) 노예성(盧禮成)이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하고, 경안군 내외와 나인 노예성, 박씨, 당대의 고승(高僧) 취미수초(翠微守初) 등이 시주하여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와 금문(金文)이 조각하여 조성한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발원문을 통해 경안군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나인 노예성이 경안군의 수명장원을 위해 발원 조성한 관음보살상이라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크며, 특히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쪽빛 저고리 안쪽 면에 적힌 발원문은 당시 정세의 일 단면을 읽을 수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어 이 상의 사료적 가치를 더 해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이 관음보살좌상은 1662년이라는 제작시기와 조성주체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인 대중적인 평담한 미의식이 농후하게 반영된 가운데, 이 시기 불상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조각적 완성도를 보인다. 한편 강인한 인상에서 오는 높은 정신성, 장엄이 강조된 독특한 착의형식, 역동적인 힘이 강조된 신체의 형태미 등은 조각승 혜희의 유파적 특징이여서 17세기 본격화된 조각유파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발견된 복장유물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한편, 섬유류의 유물이 존속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기후․환경 조건 등을 고려한다면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복장 섬유류 유물은 복식사뿐만 아니라 직물, 염색, 민속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순천 송광사 하사당 (順天 松廣寺 下舍堂) Hasadang Dormitory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져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제자들에게 당부하여 다시 지었다. 지금의 절은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그 중 스님들이 생활하던 하사당은 대웅전 뒤 한층 높은 곳에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왼쪽 2칸이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장식을 겸하는 간결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부엌 지붕 위로 네모 구멍을 내고 조그만 환기구를 만들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僧房) 건축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하사당의 솟을지붕(하사당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인데 전라도 지방의 살림집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를 흔히 볼 수 있다.)


상사당(하사당 위쪽에 자리한 건물은 상사당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하사당과는 달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으로, 하사당과 더불어 선방으로 쓰던 건물이지만 지금은 조계총림 방장스님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상사당은 제9대 담당국사가 보조국사 부도 아래쪽에 솟는 영천수를 마치고 사흘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 때문에 ‘삼일암’(三日菴)이라고도 불린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과 하사당


"보조국사감로탑 오르는 계단"


[송광사 수선영역]

대웅보전 뒤편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는 이 수선 영역이야말로 송광사를 승보사찰답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국사전(國師殿), 설법전(說法殿), 수선사(修禪社), 하사당(下舍堂), 상사당(上舍堂), 응진전(應眞殿) 등 여러 건축물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보조국사 부도가 있는 언덕에서 아쉬운 대로 수선 영역의 공간구성을 엿볼 수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

송광사 설법전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뒷뜰 언덕에 있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이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놓고 그 위로 네귀퉁이에 각을 이룬 또 다른 대좌를 끼워 넣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 맨 아래 2단의 정사각형 대좌는 그 위에 있는 돌들과 석질이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감로탑은 보조국사가 고려 희종 6년(1210)에 열반하자 왕으로부터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받았으나, 3년 뒤인 강종 2년(1213)에 세워졌다. 그 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 있다. 맨 아래 바닥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붕돌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의 모습은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조국사 부도와 송광사 전경]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업적에 견주어 볼 때 보조국사의 부도는 매우 간소하고 조촐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자리만큼은 송광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송광사의 크고 작은 건물의 지붕들과, 넓다 할 수 없는 경내를 촘촘히 구획짓는 막돌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모습이 담 너머로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설법전 앞 계단과 진여문"


[설법전]

대웅보전 뒤쪽의 석축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건물로서, 한때 팔만대장경을 봉안했던 장소이다. 1899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삼보사찰에 각기 하나씩 봉안케 하였는데, 통도사와 해인사의 대장경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것은 1951년 불타 없어졌다. 현재 건물은 1968년 재건된 것으로 법회를 위한 강당으로 쓰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약사전과 영산전]

대웅보전 구역, 즉 중단 영역의 한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물들이지만 공포와 지붕만큼은 복잡하고 화려한 다포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순천 송광사 약사전 (順天 松廣寺 藥師殿) Yaksajeon Hall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약사전은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있는 우리나라 법당 중 가장 작은 이 약사전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의 건물로 추정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순천 송광사 영산전 (順天 松廣寺 靈山殿) Yeongsanjeon Hall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절의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좁은 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세운 소박한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송광사 영산전 후불탱·팔상탱 (松廣寺 靈山殿 後佛幀.八相幀)

Songgwangsayeongsanjeonhubultaeng·Palsangtaeng(Buddhist painting in Yeongsanjeon Hall of Songgwangsa Temple)]

송광사 영산전(보물)에 모셔져 있는 불화들로, 조선 영조 원년(1725)에 그려졌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후불탱과,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후불탱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후불화에서 보이는 불·보살과 제자 등의 교화성중 및 사천왕·팔부중 등 호법신들에 추가하여, 국왕과 대신같은 많은 청문성중을 비롯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사리불(舍利佛)까지 등장시켜 놓았다.

팔상탱의 여덟 장면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고, 영산회도와 마찬가지로 전반에 걸쳐 칙칙한 갈색 분위기의 무거운 느낌을 준다.

후불탱은 영산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후불화이면서도 다른 영산회도 및 기타 전각의 석가후불도와는 다르게 그림 하단부에 설법을 듣는 청중들과 사리불까지 배치시킴으로써 법화경 내용에 매우 충실한 대표적인 영산회도라는데 의의가 있다. 팔상도 또한 구성이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초기 팔상도의 경향을 띠고 있으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나무 표현기법과 여유로운 경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어 당시 또는 앞선 시기 일반회화와의 관계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불일문과 운월루"


[국보 순천 송광사 국사전 (順天 松廣寺 國師殿) Guksajeon Shrine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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