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산성고개

2023. 6. 25. 06:10청주자랑 100가지/인문·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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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넘는 고개로 돌아온"

[산성고개]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 상당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낭성면을 통해 남문이나 동문으로 들어서는 길을 제외하면 상봉재나 율봉역 뒷길 같은 산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쇠내울 상류와 상당산성 언저리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하여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를 개설한 것이 산성고개이다. 눈이 내리면 자주 폐쇄되기도 했던 이 길은 현재 둘레길로 조성되었다.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25-13 (산성고갯길 입구)

출처:청주시


"청주자랑 100가지, 산성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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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목숨 살린 명암약수]

신혼초부터 악질에 시달린 초순 이라는 여인이 마침내 죽음에 이른무렵 천수사 스님으로부터 동북간 범바위이란 곳에 맑은 산골이 있으니 수양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고 그곳에 머물러 청수를 마시고 목욕을 한지 20일 만에 이름모를 병질에서 벗어나 생기를 얻었다는 데서 많은 질병환자들이 이곳에 찾아 효엄을 얻어 신비로운 약수터라는 소문이 퍼져 오늘에 이른다. 

이같은 유래를 지닌 명암약수터는 1920년대초 개발되었는데 탄산천으로 철분함량이 많아 주로 위장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효엄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현재는 식수로 적합하지 않아 폐쇄되었다.


명암약수터 주변에 붉은 황토빛 흔적이 있다. 철분 함량이 많은 탄산천의 물증이다. 현재는 식수로 적합하지 않아 폐쇄되었다.


"상당산성 옛길"


[만남의 소나무]

상당산성 옛길 만남쉼터, 소나무의 가지가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 자라면서, 사람들의 '만남'과 '인연'을 상징하는 나무로 사랑받는 연리지 소나무다.


"상당산성 옛길"


"솟대와 명암정"


"상당산성 옛길"


"상당산성 옛길에서 바라본 청주시"

우암산, 청주산업단지, 신봉동 우림필유아파트, 옥산, 사천동 남광아파트, 동림산, 국사봉, 율량동, 오창과학단지


"상당산성 옛길"


[것대산 가는 길 출렁다리와 어르신 나무]

어르신나무란? 수령이 오래되어 그 자태가 웅장하고 으뜸이 되는 나무를 "어르신나무” 라 부른다. 긴 세월동안 맑은 산소와 시원한 그늘을 준 어르신나무를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더욱 아끼고 보호합시다.


"상봉재 가는길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봉재 옹달샘]

상봉재 옹달샘은 우리고장의 중심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의 상봉(上峰) 아래를 지나가는 상봉재 정상 부근에 있는 옹달샘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청주읍성지역과 상당산성, 낭성지역을 이어주던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옛길에 있는 옹달샘이다. 옹달샘 아래 청주 지역 관리들의 선정을 알리는 암각 선정비들이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고 상봉 아래로 사람들이 오고가며 길이 만들이 지니 고갯마루에 무거운 다리를 내려 숨을 고르고 상봉재 옹달샘에서 물 한 모금으로 땀을 식히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고갯길은 변하건만 상봉재의 옹달샘은 언제나 우리를 반긴다.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음용하면 안된다.


[상봉재 포토존 조형물 설명]

구전에 의하면 옛날 미원이나 낭성에서 청주로 장을 보러올 때 넘는 재가 이 상봉재라고 합니다. 좌측의 오래된 돌탑은 사람들이 장을 보러 이 재를 넘을 때 야생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작은 돌을 지니고 다녔다가 이 고개에 하나씩 둘씩 던져 놓은 것이 이 돌탑의 유래라고 합니다.

포토존으로 재현 해 놓은 지게조형은 옛날 이 재를 넘었을 사람들이 지고 다녔을 법한 가마솥 같은 물건을 지게에 쌓아놓은 것이며, 지게를 중심으로 우측에 설치된 화강석은 괴나리봇짐의 형상을 벤치로 재구성 한 것입니다. 좌측의 구멍이 뚫린 자연석은 옛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바람같이 흘러간 무심한 세월을 의미 합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사진을 찍으며 느릿느릿 옛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돌탑의 유래와 상봉재 서낭당]

돌탑은 선사시대 이래 험준한 고갯길에 돌을 무더기로 쌓았다가 맹수를 만나면 돌을 사용하여 물리쳤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다시 돌무덤을 쌓아놓았던 데서 유래한다. 일종의 신체 보호용이었고, 방어용으로 사용한 돌무덤이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는 돌을 던져 전투를 하는 석자군이라는 군대가 있었으며, 그후 다른 병기의 발달로 원시의 돌무더기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의 습관대로 길가의 돌무더기를 보존해왔으며, 여행길에 맹수나 산적들로부터 안전을 기원하는 역할을 대신했다. 이 돌무더기는 마을의 석성황이라 부르며, 두렵고 공경하는 대상으로 발전했다.


[상봉재]

미원이나 낭성에서 소몰이꾼이나 장을보러 청주로 오가던 이들의 옛길의 고개로 것대고개 또는 상봉고개라고도 하며, 상당구 산성동 것대에서 것대산을 끼고 명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아래는 중봉으로 명암지 위에 해당되며, 그 위가 상봉에 해당된다.

상봉재를 지나면 것대골이 나오고 산성고개와 만나 청원군 낭성면 현암리와 연결된다. 상봉 지명은 그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의 산이라는 뜻으로 전국의 곳곳에 산이나 고개에 흔히 쓰인다. 명암동에는 '상봉' 아래에 있는 산을 가리키는 '중봉'이 있다. 또한 금강과 한강의 물줄기를 가르는 한남금북정맥이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상봉재에 얽힌 이야기]

청주 영기로 적을 두고 있던 김해월은 영장 남정년의 주선으로 비장 흥림의 애첩이 되었다. 그 당시 청주 병영 군관으로 있던 홍림은 팔십노모를 모시고 있었으나 슬하에 혈육이 없어 손을 보기 위해 해월이를 첩으로 맞아들여 남문 밖에서 살림을 하고 있던 중 마침내 잉태를 하여 해월이가 해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조4년(1728) 이인좌 등이 모반하여 청주성을 기습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홍림이 장검을 꺼내들고 나가려하자 후일을 도모하라고 만류하였으나 홍림은 팔십노모와 유복자를 부탁하고 나가 전사한다. 해월은 다음날 남편 홍림의 시체를 거두어 우암산 기슭에 묻고 장례를 치뤘다. 

해월의 아이가 자라 세살이 되던 해, “동자가 열 살을 못 넘기고 수액에 의해 요절하리라”는 시주스님의 말을 전해 들었다. 당황한 해월이 시주스님에게 해결방법을 증응하자 스님은 “저 아이를 보국사 주지스님 해원에게 위탁하여 열흘에 한 번씩 성황당 고개에서 기다렸다가 만나야 하며 절대 성황당을 한 발짝이라도 넘어서는 안될 것이다”고 금기를 일러 주었다. 

아이가 7세 되던 해 해월은 '절대 성황당 고개를 넘지말라’는 스님의 말을 잠시 잊고 아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성황당 고개를 넘고 말았다. 아이 역시 해월의 모습이 보이자 쉴새 없이 달리다가 그만 연못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결국 해월이 남편의 유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결하고 말았다는 모자상봉의 애틋한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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