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 조선 궁궐, 창경궁

2023. 7. 19. 05:40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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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을 향해 지은 조선시대 유일한 궁궐"

[사적 창경궁 (昌慶宮) Changgyeonggung Palace]

창경궁은 1418년 조선 3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생활하던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9대 성종은 1483년(1484년 완공) 당시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추존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여 1484년에 완공되어 그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처음 지을 당시에는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 등의 침전,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의 전각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으며,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로 불렸다. 창건 당시에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소실된 이후, 광해군 대에 창덕궁과 함께 다시 지어져 고종 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이 중건되기까지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창경궁은 경종, 정조, 순조, 헌종이 태어난 곳이자 소현세자, 추존 장조(사도세자) 혜경궁(헌경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창경궁은 1907년부터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광복 후 1983년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궁의 이름을 다시 창경궁으로 되찾게 되었고 경내에 있던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후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창경궁 昌慶宮 Changgyeonggung Palace]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 왕실동산인 함춘원(含春苑)과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 등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 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

[홍화문 일원 弘化門]

창경궁의 중심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성종15)에 창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玉川橋)가 놓여 있다.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도깨비상을 조각하였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준다.

출처:문화재청


"홍화문과 옥천교"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옥천교, 명정문  행각"


"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

[명정전 일원 明政殿]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 싸고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출처:문화재청


"명정전 및 행각"


"명정문 및 행각"


"명정전"


"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 일원 文政殿]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것이 그 예이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부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도세자의 비극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 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 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출처:문화재청


"문정전"


"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곳"

[숭문당과 함인정 崇文堂·涵仁亭]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 (순조 30) 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11) 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 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마당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하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공간에 건물만 홀로서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있어, 이곳에서 각종 공연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인다. 1486년(성종 17)에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곳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이때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한 부인은 가마를 잘못 타서 도착해보니 남의 집이었다는 재미난 기록도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숭문당과 함인정"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경춘전과 환경전 景春殿·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의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온다.

출처:문화재청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


"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 전각"

[통명전과 양화당 通明殿·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 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는 남인들을 제거한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두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문화재청


"통명전과 양화당"


"후궁들의 처소"

[영춘헌과 집복헌 迎春軒集福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했다.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헌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종기로 진찰을 받았는데, 이날 의관 서용보를 교체하는 등 정조는 왕실 의관들을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의학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정해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진찰을 시작한지 불과 15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정적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정조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영춘헌과 집복헌"


"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 일원 春塘池]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 할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내농포(內農圃)

내농포는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던 채소밭과 그 관청을 말한다. 창경궁 안에는 내농포에서 관리하는 논과 뽕밭이 있었다. 왕과 왕비는 여기서 각기 농사와 양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폈다. 농업국가의 기반산업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는 각기 농사와 양잠을 주재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대춘당지와 소춘당지"


"팔각칠층석탑"


"대온실"


"문무의 정신을 담은 곳"

[관덕정과 집춘문 觀德亭・集春門]

1642년(인조20)에 지은 관덕정은 활을 쏘던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취미정)翠微亭)으로 불리다가 1664년 현종때 관덕정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앞쪽의 넓은 터는 군사 훈련장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 정자 뒤로는 단풍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전해진다. 

집춘문은 관덕정 북쪽 담장에 난 궁문으로 문묘(文廟, 또는 성균관)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역대 임금들이 문묘로 나갈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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