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문의문화재단지

2024. 2. 19. 05:06청주자랑 100가지/문화·휴양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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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에 잠긴 역사의 보고"

[문의문화재단지]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수몰될 문화재를 보전하기 위해 조성했다. 그 외 옛 청원군 관내의 유·무형 문화재를 재현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49호 문산관을 비롯하여 옛 민가와 고인돌 등 대청댐 수몰로 이전한 많은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다. 단지 내에 있는 대청호미술관과 전시관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출처:청주시


문의문화재 예술의거리 조형물 뒤로 연보라색, 흰색, 노란색이 썩인 등나무 꽃이 음전하게 피었다.


문의종점에서 내린다. 청남대 문의 매표소를 거쳐 문의문화재단지까지 걸어간다. 2023년 12월 9일 시행된 청주 시내버스 노선 개편으로 비하 종점 발 311번 시내버스와 동부 종점 발 313번 시내버스가 기존 문의 종점에서 연장하여 문의문화재단지까지 운행한다.


문의 문의문화재단지 주차장 근처에는 수몰유래비와 조동마을탑이 설치되어 수몰민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준다.


문의문화재단지 양성문 입구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구입한다. 청주시민, 세종시민, 동주도시 시민은 반값(500원)을 받는다.

 

[양성문]

 

성(城)은 성곽(城郭)이라고도 불리며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축조물이다. 성은 인류역사와 함께 오랜 것으로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시대적 조건에 따라서 그 규모와 형식, 구조 등이 다르다.

 

우리나라 성은 산성(山城), 토성(土城), 도성(都城) 또는 읍성(邑城), 장성(長城), 진성(鎭城) 등으로 분류하는데 청주시 지역에 남아 있는 성의 대부분은 산성이다.

 

문화재단지가 자리 잡은 양성산(養性山)에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17년(474)에 축성(築城)한 산성(山城)이 남아 있으며, 이 곳 성문(城門)의 명칭도 양성산성에서 인용하여 양성문(養性門)이라 명칭하였다.


"솟대와 대청호"


"돌탑과 12지신 석상"


[기자석 (祈子石)]

 

Gijasok(Son-bearing Wishing Stone)

 

신화(神話)에서의 바위나 돌은 영험과 신격화된 인물이 태어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기자석은 다산(多産)과 번식(繁殖) 그리고 굳건함을 상징하는 돌로 남근석(男根石) 또는 아들바위로 불린다.

 

기자석의 형상은 성기형(性器形), 교구형(交境形), 말모양, 거북모양 등으로 이 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과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와는 달리 여자의 성기(性器)모양을 하고 있는 여근형(女根形)의 돌도 신앙의 대상으로 전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신동문시비"


[서덕길 효자각]

Memorial Monument of Seo Deok-gil for His Filial Devotion
청주시 향토유형 제38호
Cheongju-si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38

숙종32년(1706)에 이천인 서덕길(1599~1658)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73년에 문의면 도원리에 중건된 후,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로 옮겨 세운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청주시 향토기념물 제6호 미원 수산리 고인돌, 제5호 문의 가호리 고인돌,  제7호 내수 학평리 고인돌이 문의문화재단지 야외전시장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주막집과 대장간"


"저잣거리"


"고사목"


"오창 학소리 유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문산리 돌다리 ([淸原 文山里 石橋])]

청원 문산리석교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인데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하였다.

이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온다. 축조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하였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이다.

이 석교는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내에서도 옥천청석교, 진천농교, 청주 남석교(南石橋)와 함께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석교이다.

석교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하여 교각의 역할을 하고, 멍에석을 가구하고 상부에 넓은 석판재로 덮어 마감하였다. 특히 청주 남석교보다 훨씬 고식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형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구조적 균형감이 잡혀 있어 문화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문산리 돌다리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유물전시관"


[훙수아이 복원모습]

 

1983년 흥수굴에서 발굴된 흥수아이 유골을 토대로 하여 복원한 모습이다


[소로리 볍씨에서 청원생명쌀까찌]

소로리 볍씨

 

소로리 구석기시대의 토탄층에서 볍씨가 발굴되고 그 이전의 층에서는 유사벼가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볍씨는 중국 화북지방으로 1만 500년 전으로 기록돼 왔는데 그보다 3000여년이나 앞선 소로리 볍씨가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에서 볍씨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농경사회를 이루었던 구석기시대의 문화와 기원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고대의 쌀은 현대의 쌀과 다르기 때문에 벼의 진화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출토된 쌀의 고향 청주시 홍덕구 옥산면 소로리는 북쪽으로 차령산맥 줄기인 목령산과 서쪽으로 국사봉이 있으며, 여기에서 남동쪽으로 크게 3갈래의 능선이 뻗어 내리는 지역이다. 소로리 남쪽으로 900m쯤 떨어져서는 금강의 중요한 지류 가운데 하나인 미호강이 완만한 굽이로 흐르고 있으며, 이 미호강 줄기를 따라 청주분지의 들판이 넓게 발달하고 있어 전국제일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청원생명쌀

 

미호강변의 충적토에서 생산된 벼로 물과 공기가 맑고 깨끗한 미곡 주산단지에서 생산되어 맛과 품질에서 전국 최고의 명성을 얻고있다. 청원생명쌀은 맛과 품질에서 최고로 인정받아 전국 쌀품평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였고, 한국 소비자단체협의회의 품질평가에서 전국
1230개의 쌀 브랜드 중 12개 브랜드로 선정되어 러브미마크를 획득하는등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이는 농경역사가 깊은 청주지역이 옛부터 곡식을 재배 하는 데 있어 가장 알맞은 조건의 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의 진화"


"인류의 출현"


"불의 발견"


"두루봉동굴 출토유물"


"흥수아이"


"인류의 이동경로(추정)"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분포도"


"세계의 구석기 문화"


[오송 쌍청리 석조불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속칭 봉도리 마을 이상현씨 집 뒷곁에 있던 불상으로 1997년 문화재단지로 옮겼다. 머리 부분이 없어졌으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굵은 옷주름을 이루며 양팔을 지나 발목까지 미끈하게 흘러 내렸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95cm, 어깨폭 34cm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태함 胎函]

태함은 왕가의 태(胎)를 묻던 석물(石物)로서 이 태함은 청주시 낭성면 무성리 태봉산에 있는 영조대왕의 태함으로 추측된다.

 

영조대왕 태실은 충북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태실을 조성하면서 경위와 의식절차를 적은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英祖
胎室石欄干造排儀軌)도 충북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어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주역석(周易石)]

청주시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수습된 것으로 태극과 팔괘를 중심으로 자연의 생성원리와 속세를 떠나 맑고 고고하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이 담긴 돌이다.


"기와의 유래"


[경주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기와 綠釉鬼面瓦]

괴수와 같은 귀신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원두방형의 기와이다.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는 부릅뜬 눈과 들창코, 길게 찢어진 입에는 혀가 나와 있으며,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쳐 있고 이마에는 골곡된 뿔이 돋아 있는 무서운 형상이다.

 

귀면기와는 원래 수면(獸面)을 무섭게 의장화하여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벽사의 상징으로 목조건물의 네 귀에 부착하였다.


"기와의 종류와 사용처"


"수키와, 암키와 제작방법"


"소조나한상"


[사람얼굴무늬 수막새 人面文圓瓦當]


이 기와는 고신라시대의 것으로 영묘사터에서 수집되었는데, 살짝 웃는 모습에 눈·코·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 막새는 사람 얼굴이 음각된 목재틀에서 찍어낸 것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뒷면에 수키와를 부착시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에 이어져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사람얼굴이 장식된 기와는 황룡사터에서 출토한 치미(鴉尾)에서도 보이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부강리 고가 (淸原 芙江里 古家)]

 

이 집의 안채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부용면 부강리 김종철(金鍾喆)씨가 살던 고가를 이전 복원한 것으로 ‘ㄱ’자집 형태의 목조기와집이다. 광채는 지붕을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석와가(石瓦家))형태로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었던 형태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형태의 목조와가이고 광채는 ‘一’자 돌기와집이다. 1995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2년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거주하였던 송동촌씨의 3대 선친이 건축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건립년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ㄱ’자형 몸채와 대문채가 이건되었다. 그러나 1982년 조사기록대장의 사진에 의하면 대문간채가 없었으며 건물로 진입하는 입구의 방향도 사랑방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현 상태와는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특히 집을 진입하는 방향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문화재단지의 조성과정에서 원형대로 배치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랑방 쪽은 우진각 지붕이고 안방 쪽 날개채는 맞배집 형태이다.

건축의 형식은 일반 서민민가 중에서 전통 기와집의 형식이며 구조양식이 민도리 3량구조로 아담하고 소박한 민가 주택으로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문의현의 옛 비석"


[김선복 충신각 金善復 忠臣閣 ]

 

Memorial Monument of Kim Seon-bok
청주시 향토유형 제37호
Cheongju-si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37

임진왜란 때 조헌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인 의성김씨 김선복(1571~1592)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57년 문의면 등동리 정가울 마을 앞에 중건한 건물로서, 1989년에 해체 복원하였으며, 1998년에 문의문화재단지내의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문 편액을 걸었다.


"수국과 담장"


"양반가"


[여막(廬幕)과 묘소]

여막은 묘소 또는 궤연 (凡筵. 혼백이나 신주를 모셔 두는 곳)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주가 탈상(喪) 할때까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에 설치된 여막은 강내면 연정리 한양조씨 문중의 조육형(趙六衡)과 부친 조병천(趙炳天. 2000년 4월 작고)이 대(代)를 이어 시묘(侍墓, 부모 상을 당하여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생활하며 묘를 보살피는 일)를 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여막과
묘소를 재현하였다.

 

특히, 조병천옹은 지난 1957년 부친이 사망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3년동안 생식을 하며 시묘생활을 했으며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묘소를 옮김)한 뒤 또다시 3년동안 여막에서 시묘 생활을 했다.

 

우리의 옛조상들은 효(孝)를 백행지본(百行之本)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였으나 위 두 사람의 효행은 인륜(人倫)과 천륜(天倫)이 사라져가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여막과 묘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노현리 고가 (淸原 蘆顯里 古家)]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문의면 노현리 이양훈(李讓勳)씨가 살던 가옥을 이축한 것으로 당초에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김승지(金承旨)의 종가(宗家) 댁이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 형태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광채와 사주문(四柱門), 측간(厠間)은 목조초가이다. 광채는 ‘一’자 집이다.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0년 6월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약200년 전에 지었으며, 엄씨, 김씨가 살다가 연안 이씨가 입주후 이성훈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조사 당시에 안채, 사랑채, 곳간, 축사 등 4채의 전통기와집이었다고 조사되어 왔다.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건하여 재건축되었으며 현재는 ‘ㄱ’자형 안채와 ‘1’자형의 대문간 및 곳간, 축사로 건축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건축되지 않았는데 이건하는 시기에 사랑채가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또한 이전과정에서 안채의 지붕의 합각부분이 조금 높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어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박재환옹]

 

옹기는 점토와 천연잿물을 사용하여 1,2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질그릇을 말하며, 옹기장이란 전통기법에 따라 독과 항아리를 만드는 장인을 가리킨다.

 

박재환 옹기장은 1982년 이곳 봉산리 점촌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대째 전통웅기 도공으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재환옹의 7대조부터 천주교 신자였는데, 6대조 박태진공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옹기를 굽기 시작한 이후 옹기마을로 번성하여 마을이름도 점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옹기마을이 형성된 것은 미호천 유역에 점토가 많아 태토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박재환옹이 주로 만드는 옹기는 항아리, 소줏고리, 장군, 자배기 등의 생활용기이다.


"대청호 조각공원과 대청호미술관"


"애국지사 일곱분의 상"


"풍요로운 내일, 이상필"


"야! 신난다, 강완규"


"황궁, 박대순"


"Slice Image 남자, 박찬걸"


"꿈꾸는 새, 장백순"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의문화재단지는 1980년 대청댐 건설이 계기가 되어 1992년부터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화재 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청주 시내 유 · 무형의 문화재 등을 수집 전시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고 배우기 위한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단지 내에는 문의 아득히 고인돌, 미원 수산리 고인돌, 내수 학평리 고인돌이 이전되어 있고 문의현의 관아 객사 건물인 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이 이전 복원되었으며 낭성면 관정리와 문의면 노현리, 부강면 부강리에서 민가가 이전되었으며, 서길덕 효자각, 김선복 충신각 및 문의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이전되어 있다.

 

옛 조상들의 생활 풍습을 알기 위하여 양반 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성곽 등이 고증을 거쳐 건립되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대왕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 70호인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를 비롯하여 군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 있다. 

 

출처:청주시


[가덕 국진리 소나무]

 

이 소나무 3그루는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국전리 음짓마을(문의IC 일원) 수호목이었다. 2001년 청주-상주 간 고속도로 착공으로 베어질 위기에 있던 소나무들을 이 마을 출향인사인 이은봉씨가 사재를 털어 문의 문화재단지로 옮겨 심은 것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문의 문산관 (淸州 文義 文山館)]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현의 객사이다. 객사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 보름으로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한 관아건축이다. 건물구조는 지붕이 좀더 높은 3칸의 정당이 중앙에 있고 그 좌측에 4칸, 우측에 3칸의 익실(翼室)을 두었으며, 전면에 중문․외문, 측면에 무랑 등이 부속되었고, 정당은 벽돌을 깔고 좌․우익실은 한국식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66년(현종7년) 문의읍지에 현령 이명하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붕의 암막새 기와에‘옹정육년 무신사월(擁正六年 戊申四月)’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28년(영조4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 건물은 1979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1997년 문의문화재단지 내 현 위치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출처:문화재청


4월 말 철쭉꽃과 잎이 활짝 피었다. 바람이 분다. 물이 흐르지 않는 도랑 가에는 꽃비가 후드득 떨어지며 물을 만든다.


문의문화재단지 답사 후 문의 종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청주 시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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