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국고개 문화거리

2024. 3. 9. 04:33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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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개 문화거리]

 

이 거리는 고려시대 이복이라는 효자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국을 얻어 품이 안고 넘다가 국을 쏟아서 국고개라 한다. 이복은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겨울에 금강 물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모친을 치유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공주시 옥룡동 부근에 국을 엎질렀다는 뜻의 갱경골 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갱경골은 이복이 어머니에게 먹일 국을 얻어 귀가하던 중 서두르다 넘어져 국을 엎지른 곳이란 유래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국고개는 박물관사거리에서 옥룡동사거리 방면의 나지막한 고개로 고개 양쪽의 양쪽으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공주중동성당 등 근현대 문화유산이 위치하고 있다.


[국고개 우물]

 

2009년 공주시에서 추진한 국고개 문화거리조성 사업을 진행하던 중 발견된 우물이다. 1970년대 국립공주박물관 건립 당시 지하 부분을 메우지 않고, 콘크리트로 덮은 관계로 원형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축조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통우물의 축조방식인 허튼층 쌓기 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최소 100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터는 일제강점기 아메미야 다다마사 가 얼음공장을 운영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박물관 인근에 벚나무를 식재한 인물이기도 하며, 그의 아들 아메미야 히로스케는 충청남도에 200여 점의 유물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우물 깊이는 2.97m이며, 지름은 약 1.2m이다. 발견 당시에도 물이 용출되고 있었다. 이에 공주시와 협의를 거쳐, 2010년 난간과 지붕 등 지상부분을 복원하였다.


"효심공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한채의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비로, 향덕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대의 사람으로,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의 효행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채, 토지를 내려 주었으며, 비를 세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리’라 하였다.

 

앞에서 보아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더 오래된 비로,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새긴 문구중에 ‘중립(重立:다시 세움)’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의 것이긴 하나 경덕왕 때 세운 원래의 비는 아닌 듯 하다.

 

왼쪽의 비는 8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몸의 윗변을 둥글게 다듬어 놓았다. 역시 향덕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조선 영조 17년(1741)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써서 세워 놓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효행을 표창받은 인물이며,『삼국사기』에 그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어, 효행사적으로 볼 때에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34호 효자 이복비]

 

이 비는 고려시대 향리인 이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본래는 옥룡동 비선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에 새로운 행적비와 함께 옥룡동 산7번지(옥룡동사무소 서남쪽)으로 옮겼다가 2016년 공주 효심공원을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복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보이는데, 고려의 아전이었고 효자였다는 기록만 있을뿐이다. 그 이후에 작성된 기록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다만 효자 이복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전설과 이복이 어머니를 위해 들고 가던 국그릇을 엎었다 하여 국고개라 한다는 지명유래에서 이복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다.


"행복가족상"


"효원탑, 효행상, 이복비"


"효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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