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 공주 우금치 전적

2024. 3. 11. 04:58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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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

[사적 공주 우금치 전적 (公州 牛禁峙 戰蹟) Ugeumchi Battlefield, Gongju]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동학혁명위령탑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역사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출처:문화재청


"공주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식"


"사람이 하늘이다, 우금티, 우금티터널"


"동학혁명위령탑"


"동학혁명 위령탑 탑비문(전면)"


동학혁명 위령탑 탑비문 전면. 1985년에는 한 사회단체에 의해 동학혁명과의 계승관계 등 이념갈등 소지가 있는 비문의 일부 문구(5.16혁명,10월 유신,박정희 대통령)가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다.


동학혁명위령탑 탑비문 후면 감사문. 박정희 문구 비문이 훼손되어 있다.


[한 서린 동학농민군의 성지, 우금티전적지]

 

우금티 고개는 호서지방의 요충이며 중부지역의 거점으로 충청도 감영소재지가 있는 공주의 남쪽 중요한 관문이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죽창으로 대항한 곳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뜻 깊은 곳이다. 동학군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일본 군대의 총칼에 맞서 싸웠다. 

 

6, 7일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결국 전멸하였다. 이후 전봉준의 처형으로 1년 동안 동학농민전쟁의 공주전투는 막을 내린다.

 

이 운동은 처음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곳은 동학 농민군의 민족운동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으로 국가사적지가 되었으며, 동학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동학혁명군위령탑(1973)을 세웠다.

 

출처:공주시


"우금치 쓰러진 사람 모양 조형물"


"우금치 장승"


"우금티 터널 옆 느티나무"


"우금치에서 바라본 이인 방향"


"우금치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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