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아산 이충무공 유허

2024. 3. 18. 05:25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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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Asan]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는 국보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보물 16점 (선무공신교서, 기복수직교서 등) 등이 소장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구 현충사]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들고자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6년)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었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현충사도 없어제기 되었으나 1932년 6월 5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민족성금으로 이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의해 현충사가 새로 세워짐에 따라 1968년 9월 9일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된 것이다.


"반송"


"충의문과 현충사"


"충의문 태극문과 현충사"


"현충사 이순신 장군 영정"


"현충사에서 바라본 전경"


[옛집]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사시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일부는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옛집 앞 우물 충무정"


[보호수 수령 500년 은행나무]

 

충무공 고택 옆에 자리한 이 두 그루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살인 넘은 것이다. 이충무공이 결혼 후 이곳 활터에서 말을 달리며 무예를 연마하던 모습 그리고 장군께서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운구가 이 집 앞을 지나 장지로 가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이 온 나무를 덮어 노란 우산 두개를 펼쳐 놓은 듯한 모습으로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두 그루 모두 암나무로 햐마다 많은 은행이 열린다.


"활터"


"이충무공 후손의 묘"

위에서부터 이충무공의 3대, 4대, 8대, 10대손의 묘


[졍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삼는 것이다. 이 정려는 이충무공 집안에서 난 네분의 충신(충무공 이순신,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흥무, 충민공 이봉상)과 효자 한 분(이제빈)을 표창한 것이다.


타루비 복제품과 여수 고소대 비각 안 보물 타루비


"충무공이순신기념관과 충무문"


[이충무공 영정]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와 있는 기록과 당시 14대 종손의 모습을 참고로 하여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1973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국보 임진장초 복제"


국보 서간첩 복제(이순신이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 6편을 모아 역은 것이다. 사사로운 편지글로 이순신의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편지마다 전란을 걱정하는 애타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국보 난중일기 초고본 복제"


"국보 이순신  장검 복제"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과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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