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아산 맹씨 행단

2024. 3. 27. 05:01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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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 House of the Maeng Clan, Asan]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으로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흑소 타고 옥피리 부는 맹사성"


"맹사성 영정"


"고불정신"


"청백리"


"인물관계도"


[어필사액 현판]

 

영조가 내린 글씨를 후손들이 새겨 만든 현판으로 1750년 영조가 온양 행차시 묘소에 제를 지내고 충효세업(충과 효를 대대로 힘써 오다), 청백가성(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예로 삼다) 어필사액과 옥피리등 맹사성 유품.


"보호수 수령 320년 회화나무와 맹씨행단"


[쌍행수]

 

1982년 11월 1일에 충남도 나무로 지정된 쌍행수로서 640여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그루는 높이 40m, 둘레 5m 80cm, 다른 한 그루는 높이 45m, 둘레 8m 50cm로 아산 맹씨 행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으로 봉직하고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1380여 년경에 심은 것이다. 당시 맹사성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곳을 행단이라 칭하였다. 한편 이 나무는 2~300여 년 전부터 싹이 원목 옆 사방으로 자라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 것이며 1987년 원목의 구멍 안이 부패하여 외과 수술을 받았다.

쌍행수와 은행


[세덕사]

 

두문동(고려 멸망부터 조선 건국까지 충절을 지킨 고려 유신)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조선조의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맹유는 고려 말 불사이군(고려와 조선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으로서 충절을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맹씨고택]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2월 무민공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실제로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이 죽은 뒤,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최영의 손녀사위)의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1482년(성종 13년), 1642년(인조 20년), 1814년(순조 14년), 그리고 1929년에 각각 건물을 손질하여 고친 기록이 있으며, 고택 가구부에 남아 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이 견실한 고법을 간직하고 있어 고려 시대의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된다. 건평은 90.72㎡(27.5평)이다. 정면 4칸 중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달았으며, 좌우에는 각각 3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고택 정면 창호의 독특한 형식, 정자살의 형태, 두터운 문틀 등에서 오래된 형식임이 잘 나타나 있다. 대청과 툇마루는 우물마루(井) 방식을 따랐다. 좌우 구들방 전면으로 하인방 아래로 아궁이가 있고 뒤편 후원으로 굴뚝을 설치하였다.


맹씨 고택 공포(익공양식(공포 구조인 주심포, 다포, 익공 중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 발생 과정 중 초기양식이다.


"맹씨행단 담장과 숲,구괴정 가는 문"


[구괴정]

 

이 정각은 조선 세종 때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티나무를 세 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구괴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600여 년 전의 이곳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 주는 배방산과 복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도 살폈다. 6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 그루 중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 하였던 5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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