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뱃길을 수호하던 요새, 보령 충청 수영성

2024. 3. 30. 06:07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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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Navy Headquarters of Chungcheong-do Province, Boryeong]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문화재청

충청수영성 서문 홍예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賑恤廳)]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장교청과 삼문만이 남아있으며,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음.

 

◦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 부엌 등이 있으며, 충청수영 고지도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음.

 

출처:문화재청

 


"영보정과 낙락장송"


"보령방조제 전경"


"오천항 전경"


"오천항 전경"


"오천항 전경"


"내삼문과 선정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충청수영 내삼문 (忠淸水營 內三門)]

 

충청수영의 북동측에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3칸 중 가운데 한칸을 높여 솟을지붕형태로 건축되었다. 작은 규모의 건축물임에 비해 기둥과 보, 도리 등이 모두 견실한 부재로 건축되어 건물의 품격이 당당하고 육중해 수영성내 중요한 영사(營舍)의 출입문이었던 듯 하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충청수영 장교청 (忠淸水營 將校廳)]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 장교청(객사), 내삼문만 남아있음.

 

◦ 장교청은 1833(순조 33년)에 만들어져 수영의 군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오른쪽 끝 한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세 칸은 넓은 대청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임.

 

출처:문화재청


[사적 보령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으며,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출처:보령시


"장교청 위 성곽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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