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진악산 보석사

2024. 4. 25. 06:51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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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후 보석사를 찾는다. 석동삼거리에 내려 1.9km 걸어간다.


"석동교와 인삼밭"


"밭일 하시는 할아버지와 자전거"


"산등성이에 떠오르는 해"


"금산간디학교"


"보석사 표석"


"범죄 없는 마을 석동2리(심천)마을"


"마을벽화(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진악산 보석사]

 

신라 때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고 조선후기에 중건한 보석사의 영고성쇠를 묵묵히 지켜본 보석사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보석사대웅전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143호로서 지정․관리 되고 있는 금산의 명물과 명소이다.

 

통일신라 현강왕 12년(886)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금산 진악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의 당우는 조선후기 명성왕후가 중창하여 원당으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은 앞면 두 칸 옆면 세 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다포계양식 주불전을 장엄하고 있다. 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있는 요사채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공주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를 하면서 보석사에 오면 거처한 곳이다. 주불전의 오른쪽에서 뒤로 약간 물러선 자리에는 보석사의 영각 기허당이 위치하고 있다. 앞면 세칸 옆면 한 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소탈한 주심포양식으로 지어 규모 면에서나 외양에서 대웅전보다는 한층 격을 낮춰 지은 집이다. 영각의 이름을 ‘기허당’이라 한 것은 기허당 영규대사의 법명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그 외 기허당의 오른쪽 뒤 언덕에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출처:금산군

금산 진악산 보석사 일주문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의병승장비 (義兵僧將碑)]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려다 전사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영규대사(∼1592)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승병 수백명을 모아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고, 이어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일은 이후 전국적으로 승병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숙종 5년(1839)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일제가 1940년 비를 보호하던 비각을 부수고 비를 묻어놓았던 것을, 해방 후 다시 꺼내 세워놓은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보석사 전나무와 단풍나무"


"천연기념물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의선각 (毅禪閣)]

 

의선각은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계룡산 갑사와 이 곳 보석사를 왕래하며 수도할 때 처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승려로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금산에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다 칠백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창녀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가 ‘의선각(毅禪閣)'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출처:문화재청


"목탁"


"보석사 무쇠솥과 항아리"


마을 어르신들이 석동2리(금천)발 금산행 버스를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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