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조선수군재건출정공원

2024. 6. 27. 06:24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반응형

"충무공 이순신과 구례군민들의 애국애족정신"

[구례 조선수군재건출정공원]

 

하나로마트 구례농협 본점 인근, 손인필의 옛 집터 자리에 난중일기 등 역사자료 고증에 따라 조선수군 재건의 여정이 담긴 벽화, 청동부조 조형물, 정자 등이 있는 조선수군재건출정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공원에 설치된 벽화에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장군이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후부터 9월 16일까지 전남 일대에서 조선 수군을 재건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44일간의 여정이 담겨 있다. 이때 이순신장군 휘하에는 손인필, 황대중을 비롯한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때 조선수군을 재건하는데 이순신장군이 설치한 통제영 주둔지이자 조선 수군 재건을 결의한 출정소가 손인필의 집이었다고 한다. 군관 손인필은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수군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병참물자 조달과 군사 모집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아들 손응남도 긴급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손인필 비각 옆에는 큰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명 이순신 바위로 불리면서 이순신장군이 구례에 머물렀을 당시 바위에 앉아 구국의 방향을 고뇌했다는 이야기도 담겨있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고뇌한 이순신 장군의 뜻을 기리고자 정자를 짓고 구국정이라 이름 붙였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구국정과 청동부조 조형물


 

"남도 이순신 길 조선수군 재건로"


"남도 이순신 길 조선수군 재건로"


"구례 조선수군재건출정공원"

청동부조 조형물


[이순신장군 백의종군(白衣從軍) 바위]


이 바위는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1597.4.1.~ 8.2.) 할 당시 금오랑(의금부도사)을 보내고, 구례에 머물면서 이곳에 앉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고 하여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바위'라 불리어 진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4월 26일 구례에서 하룻밤을 자고, 구례현감 이원춘과 손인필등의 도움을 받아 다음날 적의 전황을 살피러 순천 왜성으로 갔다. 5월 14일 구례현청으로 돌아와 정사준. 정사립 · 양정언 · 손인필 · 손응남. 장세호 · 구례현감 이원춘 · 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나랏일을 종일토록 논의하였다. 5월 27일 석주관을 떠날 때까지 구례에서 머문 14일간은 이순신장군에게 있어 우국충정으로 고뇌하는 시간이었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자, 또다시 구례현을 찾아 이원춘 · 유해 · 손인필 손응남 등을 비롯한 구례백성들에게 조선수군채건을 호소하였다.

 

백의종군 당시 이순신 장군이 깊은 고뇌를 다음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충성을 다하려는데 죄가 이미 이르렀고
효성을 바치려는데 어버이마저 가버렸네
이제야 어서 죽기만 기다려야 할런가
마음을 돌아보니 가슴은 찢어지고
비조차 내리는데 금오랑은 길 재촉하네
천지에 나같은 사람 또 어드에 있을꼬


[공신 손인필 비각]

손인필은 고려 때 효자 손순흥(928~994)의 후손으로써 석주성과 노량해전에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속수구례지』에 의하면 손인필은 셋째 아들 숙남에게 석주성을 지키게 하고, 큰 아들 응남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따라갔다. 그 밑에서 활약하였다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큰아들을 잃고 손인필도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구례군 간전면 삼신동 뒷산에서 장례를 치고, 참선무훈(參宣武勳)으로 특별히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추증 받았다. 1964년 그 후손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비각이다. 2015년 조선수군 재건 출정공원을 만들면서 비각의 위치를 뒤로 옮겼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