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7. 09:54ㆍ뚜벅뚜벅 대한민국 천연기념물/천연기념물 소나무
서울 헌법재판소 본관 왼쪽 언덕에는 승리의 나무가 있다.
2024년 11월 27일부터 이틀간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117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이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서울 재동 백송’은 이번 폭설로 직경 5~20cm, 길이 3~8m에 이르는 가지 5곳 이상이 부러졌다. ‘서울 재동 백송’은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로 보존가치가 높은 재동 백송의 피해 소식에 28일 국가유산청은 "5~20cm 직경의 백송 가지 5개가 부러진 것을 파악했으며,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수목 상부에 쌓인 눈을 즉시 제거했다"며 "정밀한 피해 정도와 상처 치료 방안을 강구하기 위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서울 재동 백송’ 신문 기사를 보고 2024년 7월 21∼22일 이틀간 경기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500㎜가 넘는 폭우와 강풍으로 밑동이 뿌리째 뽑혀 쓰러진 '천연기념물 포천 초과리 오리나무'가 떠올랐다. 헌법재판소 600살 어르신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백송은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며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애초부터 중국에서는 백송을 망자의 추모를 위해 묘지 부근에 많이 심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백송들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 가져다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백송이 많이 모여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90년 7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 있던 한국에서 가장 큰 백송(천연기념물 제4호, 키 16m, 가슴 높이 줄기둘레 5m)이 돌풍으로 쓰러져 죽은 이후에, 서울 재동 백송은 우리나라 가장 큰 백송이 되었다.
서울 여행을 가면 헌법재판소에 종종 들렀다. 600살 어르신을 뵙기 위함이다. 헌법재판소 입구 경비실에서 백송 관람 하러 왔다고 말하면 방문자의 성명과 연락처를 적고 방문증을 발급해 준다.
현재는 대통령의 탄핵 심판 사건을 맡은 헌법재판소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도서관 출입 및 입구 통제도 한다.
600살 어르신은 헌법재판소 본관 왼쪽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국가유산청은 어르신을 '천연기념물 서울 재동 백송'이라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의 설명에 따르면 어르신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7m, 뿌리부분 둘레 3.82m이다. 다른 백송에 비해 큰 편이며, 줄기가 아랫부분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줄기를 지탱하기 위한 받침대가 세워져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좋은 편이다.
백송의 잎은 침엽수이며 소나무나 잣나무는 2개씩 잎이 모여 나는데 백송은 3개씩 모여난다. 다른 소나무와 쉽게 구별되며 단면을 잘라보면 삼각형을 이룬다. 꽃은 5월말에 피고 열매는 다음해의 10월에 익으며 발아율은 50∼80%이다.
어르신은 조선왕조 창업 즈음에 누군가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경복궁이 머지않은 북촌 사대부가의 뜰에서 자랐다.
국가유산청이 발행한 '문화재 이야기 여행 천연기념물 100선'에 따르면 "이 터는 영조대왕 전후 7회에 걸쳐서 이조판서를 지낸 학당 조상경의 집터이며, 조선 후기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주도했던 곳으로 신정왕후(조대비)는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가 철종이 즉위하면서 대왕대비가 되었던 곳이다.
이 백송이 자라는 조대비의 친정에 이하응이 자주 드나들면서 조 대비와 친분을 유지했다. 이를 계기로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가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케 함으로써, 이하응(흥선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그가 아직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기 전,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의 은밀한 계획을 세웠던 곳이 바로 이 백송이 바라다 보이는 조대비의 사가 사랑채였다. 모두가 불안해 할 때 대원군은 이 백송의 둥치가 전보다 더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상서롭게 여겼다고 한다. 그에게는 무정한 자연물에서 어떤 기미를 보고 인사를 점치는 특유의 직관력이 있었던 듯하다.
개화파 홍영식도 이 백송을 뜰에 두고 즐겼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대역죄로 처형되고 그의 집은 광혜원으로 거듭난다. 그 후 백송이 있는 터와 건물은 대한제국이 매입하여 관용으로 쓰다가 경기여고가 들어서게 된다.
경기여고 이후 창덕여고가 거쳐 갔고 지금의 헌법재판소는 1993년에 들어섰다."
헌법질서의 유지와 진리추구 및 정의구현을 구상적인 인물상으로 상징화한 헌법수호자의 상 오른쪽 언덕에 어르신이 보인다. 어르신은 늙고 쇠약해져서 1979년 외과수술을 하였고, 이후 생기가 다시 살아났다. 줄기를 지탱하기 위한 받침대가 세워져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좋은 편이다.
2024년 11월 27일 내린 폭설로 어르신은 5개 이상의 몸이 찢겨나가는 아픔을 겪으셨다. 600살 어르신은 여전히 눈만큼 하얀 몸에 머리는 늘 푸르시다. 지면에서부터 커다란 줄기가 갈라져 나와 승리의 V 자를 그리며 꿋꿋이 서 있다. 승리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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