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푸성귀의 마지막 헌신

2025. 1. 20. 05:27구석구석 먹거리/토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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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의 ‘시래기’(해인으로 가는 길, 2006년 발표)란 시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제일 먼저 버림받은 우거지가 한겨울 추위와 바람눈과 서리를 견디고 시간이 흐르면 시래기가 된다시래기는 푸성귀를 삶거나 날것으로 말린 것이다한겨울 바람서리를 모두 견디며 마르면서 서서히 숙성발효한다.

 

시래기는 맛있어서 먹었던 식재료는 아닐지라도 한겨울 푸르름을 잊지 않게 해주고 허기도 달래준다제일 먼저 버림받았지만추위바람서리를 견디며 마지막까지 헌신한다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마지막 헌신을 맛본다.

 

도종환 시인의 시를 읽으며 땅이 키우고 바람이 풍미를 더한 시래기 맛집을 떠올려 본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보령빌딩 뒷골목엔 반듯한 간판은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래기국밥 집이 있다. 2017년 처음 찾아 시래기국밥을 먹은 추억이 있다. 7년 만에 다시 방문한다. 몇번 길을 헤맬 만큼 골목 구석에 자리한다. 골목 초입에 ‘홍천 막장 시래기국밥 전문’이라 쓴 글과 빨간 화살표가 식당을 알려준다.

 

조금 걸어 식당이 있는 건물에 다다른다.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 아래 ‘씨레기국밥전문’이라 쓴 노란 간판과 식당 입구를 알리는 빨간 화살표가 7년 전과 똑같이 붙어 있다. ‘홍천 막장 시래기국밥 전문’이라 쓴 네모난 하얀 간판과 영업시간 알림판은 새로 설치 한듯하다.

 

영업시간은 평일 오전6시30분~오후2시, 토요일 오전6시30분~10시까지이며 일요일은 휴무이다. 시래기국밥(4,500원) 단일 메뉴이며 삶은 달걀(500원)도 판매한다.

2024년 시래기국밥(사진 좌측, 중앙)/2017년 시래기국밥

2017년 시래기국밥 집을 처음 찾았다. 초행길에 식당 간판도 없어 골목을 여러 번 헤맸다. 겨우 식당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근처 회사 분들과 단골로 보이는 손님들도 붐볐다. 손님들이 쓴 글들과 그림, 사진들이 식당 벽을 장식했다. 시래기 손질하는 모습, 막장 담그는 모습, 송해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단일메뉴인 시래기국밥은 3,500원이었고 삶은 달걀은 공짜였다. 남 사장님이 열린 주방으로 주문을 알려줬다. 여사장님이 갈색 그릇에 밥을 담고 통에 끓고 있는 시래깃국을 담아 몇 차례 부었다 따랐다 했다. 화구에 팔팔 끓인 국밥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토렴은 아니지만 알맞은 온도를 맞추려는 배려의 조리법이었다.

 

검은 그릇에 시래기국밥을 푸짐하게 담아 내줬다. 찬은 김치 하나였다. 막장, 시래기, 밥이 어우러진 국밥을 배불리 먹었다. 밥이랑 국은 추가로 다 먹을 수 있었다. 주인장분들은 손님들에게 웃으며 밥과 국을 더 드시라고 말했다. 사람 냄새나는 식당이었다. 맛도 좋았다.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 시래기국밥

2024년 9월 오전 9시 30분, 7년 만에 시래기국밥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어중된 시간이라 손님은 많지 않다. 시래기국밥을 주문한다. 가격이 4,500원이다. 7년 동안 천원 올랐다. 삶은 달걀은 이젠 공짜가 아니다. 500원을 받는다.

 

남 사장님이 주문을 받고 손님 응대를 한다. 열린 주방 커다란 통에는 시래깃국이 끓고 있다. 한결같은 모습이다. 여사장님이 국밥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화구에 얹어 끓여내는 방식은 아닌 걸 식사 후 나오며 확인한다. 내부 사진과 글도 변함이 적다. 몇몇 글과 사진을 둘러보는 사이 시래기국밥이 식탁에 놓인다.


숟가락을 들고 시래기국밥을 바라본다. 직접 담근 막장과 국산 시래기, 멸치육수로 끓여낸 국밥이다. 연갈색 국물에 무청 시래기와 하얀 쌀밥이 넉넉하게 들어 있다.

 

국물만 크게 한술 떠먹는다. 된장의 깊고 진한 맛보단 깔끔하고 구수하다. 직접 담은 막장의 숙성된 맛이다. 멸치 육수의 여린 감칠맛과 푹 삶아지며 우러나온 시래기 발효의 맛도 은은하게 뒤를 받친다. 군더더기 없는 국물 맛은 몇 술 더 국물만 수저질하게 한다.

 

국물을 음미한 후 국물과 건더기를 퍼 올려 입속으로 전달한다. 입속에서 밥, 국물, 시래기가 뒤섞인다. 꼭꼭 씹는다. 밥에서 누룽지 맛이 난다. 담백한 밥에 스며든 국물은 알맞은 온도와 간을 맞춘다.

 

시래기는 살짝 건조한 제철 시래기를 한 번 더 삶아 사용하고 질긴 부위도 일부분 제거한다. 정성 들여 손질한 시래기는 나긋나긋하면서도 식감이 살아있다. 숙성 발효하며 잘 익은 채소가 내는 삭힘의 맛이다. 어금니에 사박사박 씹히며 구수한 국물을 쏟아낸다.

 

펄펄 끓는 정도가 아닌 뜨뜻한 온도의 국물은 수저질을 쉬지 않게 한다. 찬은 배추김치 하나지만 부족하지 않다. 가득 담긴 국밥 한 그릇이 뚝딱 비어진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7년 전의 맛과 다름없다. 양과 인심, 정성으로 배는 두둑하고 꾸밈없는 수수한 맛에 속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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