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 07:55ㆍ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죽림서원 (竹林書院)]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원리를 중시한 이황에 맞대어 경험을 중시했다.
성혼(1535∼1598)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이와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많은 벼슬자리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서원은 이이와 성혼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황산서원이라 하여 세웠다. 후에 김장생을 추가하였으며 현종 6년(1665)에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조광조·이황·송시열의 위패를 추가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6년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 사우를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은 출입구인 홍살문과 외삼문을 통하면 동재, 서재, 내삼문, 사우가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죽림서원의 중건비와 황산서원의 지비를 세워 놓았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묘에 모시고 있는 선현들만 모신 서원으로,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국가유산청
[죽림서원]
지정별 :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위치 :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3
서원은 유현(儒賢: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을 제사 지내는 사(祠)와 양반의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로 구성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이 서원은 인조 4년(1626) 창건 당시에는 지명에 따라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으나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서원(書院)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적은 현판을 내리는것) 받았다. 그 후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철폐되었으나 1946년에 다시 제단(祭壇)을 설치하였고 1965년에는 사우(祠祠)를 복원하였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묘정비(竹林書院廟庭碑)」를 보면, 서원이 세워지게 된 유래를 설명하면서 황산(黃山)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서원이 들어섰다고 하였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외삼문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던 강당인 헌장당(憲章堂), 유생들의 기숙처였던 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신문을 거쳐 죽림사(竹林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우(祠宇)가 있다. 사당 앞 좌우측에는 공적비, 중건비 등이 세워져 있으나 좌대(座臺)만 남아있는 것도 있다.
제향 인물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6인을 제향(祭享)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儒賢)이어서 '육현서원(六賢書院)'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죽림서원]
죽림서원 도록(都錄)에 의하면 인조4년(1626)(주1.주2)에 서원을 짓고, 문성공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문간공(文間公) 우계 성혼(牛鷄 成渾)을 모신 후 황산서원이라 하였다. 그 뒤 사계 김장생을 추배하고, 현종 6년(1665) 죽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추배하였다.
고종8년(1871)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철되었다가 1946년 유림들에 의하여 단소(壇所)가 설치되었다. 1965년 사우(祠宇)가 재건되었고, 유림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모여서 춘추로 제향을 행하고 있다.
출처:논산시
'바롱이의 쪽지 > 충청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계 김장생 강학 공간, 임리정 (0) | 2025.02.01 |
---|---|
우암 송시열 강학 공간, 팔괘정 (0) | 2025.01.31 |
황산근린공원(전망대) (0) | 2025.01.29 |
논산 강경산 소금박물관 (0) | 2025.01.28 |
논산 강경옥녀봉과 금강 (0) | 2025.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