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망선루

2025. 5. 16. 06:26청주자랑 100가지/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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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자취가 남은 누각"

고려 말 공민왕의 자취가 남아있는 망선루, 제일교회를 거쳐 새로운 터에 복원하다

 

[망선루]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 관청 하나로 객사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 와 머무르며 과거를 치르고 이곳에 합격자 명단을 걸었다. 1461년(세조 7)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경찰서 무덕관을 지으며 뜯겨 제일교회로 옮겼다가 2000년 12월 중앙공원에 다시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117

 

출처:청주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망선루 (淸州 望仙樓)]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출처:국가유산청


[청주 망선루]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娶景樓)라 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관아의 부속 누정(회의 및 연회 장소)으로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다.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 홍건족의 침입 때 왕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1922년 일제의 무덕전 신축으로 망선루가 헐리게 되자 청주청년회 회장이던 김태희를 중심으로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에 이건하였다. 이는 청주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다.

 

이전된 망선루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 상당 유치원 등 민족교육 운동과 한글 강습, 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세광중고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망선루의 노후로 붕괴위험이 날로 높아가자 청주시에서는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와 2000년 12월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출처:청주시


"망선루와 척화비"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척화비 (淸州 斥和碑)]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며,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인데,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국가유산청


[청주 척화비]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인데 비의 윗부분이 깨어져 ‘양(洋)’ 자와 ‘즉(則)’ 자가 없어 졌다. 그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이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위치로 옮겼으며, 높이 108m, 폭 47m의 크기이다.

 

출처:청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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