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상당산성

2023. 8. 8. 05:54청주자랑 100가지/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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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를 지킨 역사의 보고"

[상당산성]

사적 212호, 상당산성은 해발 491.2m의 상령산(上嶺山)을 포함하여 남쪽으로 향한 계곡을 끼고 쌓은 포곡식의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4.2km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정비에 주력한 관방시설의 하나로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689년에 쌓은 서원경성으로 보기도 하며, 영조 때의 기록인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궁예가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24번길 14

출처:청주시


"청주자랑 100가지, 상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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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체육관 버스 정류장에서 862-2번 시내버스를 타고 상당산성 종점에 하차한다.


"상당산성 종합안내도와 성내방죽"


[상당산성 보화정(동장대)]

조선시대 후기에 상당산성을 수축하여 충청도병마사가 항상 주둔하여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지휘소인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어 서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건물과 관련된 1747년(영조 23)에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필구가 지은 보화정기의 글이 남아 전해온다. 동장대는 6칸 규모의 건물로 상당산성도에도 보화정이 그려져 있고 건물 이름도 보화정이라 기록돼 있다. 

동장대는 이미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당초 있었던 자리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던 주춧돌 사이의 간격이 포백척(베의 길이 등을 재던 자)으로 환산되므로, 이 수치를 기준으로 복원하였다. 상당산성의 대대적인 수축 공사의 맨 마지막에 완성된 건물로 낙성과 관련된 거록이 남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청주 상당산성 동문(진동문)]

청주 상당산성의 성문은 3개소로, 북쪽을 제외한 남문(공남문)·동문(진동문)·서문(미호문)이 있다. 이와 별도로 아군이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던 암문이 동북쪽과 서남쪽에 있다. 성의 동쪽 출입구인 진동문은 동남쪽 해발 350m 내외의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77~1978년까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문루도 함께 복원되었다. 진동문은 통로 양쪽에 벽을 쌓고 그 위에 길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치 통로가 ‘ㅁ'자로 보이는 형태(평거형 성문)로 축조되었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평상시 통행이 많이 없는 성문에 주로 사용되었다.


동문을 지나 동북 암문 가는 길, 고양이와 사람을 만난다.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고 발 아래까지 쫒아온다. 먹거리를 달라는거 같다. 반대방향에서 온 등산객은 성곽따라 내려간다. 줄게 없어 미안해!


"상당산성"


[상당산성 동북 암문]

암문은 작게 만든 사잇문으로 적군에게그 위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다. 상당산성에는 남문과 동문 및 서문의 세 대문이 있고, 서남암문과 이곳 동북 암문이 있다. 

상당산성의 북쪽 성벽에는 성문이 없고 동쪽 성벽에는 수문과 동문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다. 성의 안쪽과 바깥으로 통하는 능선이 남쪽으로 이어진 곳에 서남 암문이 있듯이 북동쪽의 능선으로 이어진 위치에 동북 암문을 만들었다. 이 암문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드나드는 곳일 뿐만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로 나가서 에워쌀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마련하였다. 

규모는 정면의 너비 약 137cm, 높이 162cm이고, 안쪽에서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막는 구조이다. 특히 이 암문의 안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암문을 만든 책임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1728년(영조 4)의 무신란(이인좌의 난)때 성문을 열고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이 있어 사실을 실증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당산성 3호 수구]

수구는 성 내부의 물이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보통 수문은 사람의 통행이 가능한 큰 규모이지만, 수구는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시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상당산성에는 남서쪽 1호 수구, 서쪽 2호 수구, 북쪽 3호 수구에 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3호 수구는 성벽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성벽 안쪽에는 너비 250㎝, 길이 210㎝ 크기의 타원형의 시설이 있는데, 이곳에 모인 물이 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구조이다. 성벽을 통과하는 부분인 배수로는 바닥면에 너비 80㎝, 두께 16㎝의 돌을 깔고 경사가15° 정도 되도록 하여 물이 자연스럽게 성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배수로의 규모는 길이 200㎝, 너비 34㎝, 높이35cm 정도이다. 물이 밖으로 나가는 출수구는 정면에서 볼 때 네모꼴이며, 바닥면의 판석을 성벽 밖으로 돌출되도록 하여 흘러나가는 물이 성벽의 하단부에 바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출수구의 크기는 32×34㎝ 정도이다. 발굴 조사 결과 3호 수구는 처음 설치된 이후 적어도 3차례이상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당산성 포루터 1]

포루*는 치성이나 적대**위에 포를 배치하고 건물을 지은 군사시설이다. 이곳은 성벽 안쪽에서 밖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도록 되어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영조 20년(1744) 영휴 스님이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영조 1년(1725)에 포루 15곳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40년(1764)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도」를 통해 포루 15개의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포루의 형태가 2~3칸 규모의 작은 기와지붕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포루 터 1은 공간이 협소하지만 높고 평탄하여 주변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2002년 발굴 조사 결과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조선 후기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 치성: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하고, 전투 시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을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
** 적대 성벽에서 외부로 돌출된 시설물로, 특히 성문의 양측에 설치한다.


"상당산성"


[상당산성 서문(미호문)]

상당산성의 성문은 총 5개로 남문 · 동문 · 서문과 동북 암문* , 서남 암문이 있다. 이 중 서문의 통행로 천장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직사각형의돌을 수평으로 걸쳐 만들었다. 문밖 양쪽으로는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암문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서문에 적용하여 건축 비용을 줄이고 전술적 효과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서문이 있는 곳의 지형은 호랑이가 뛰기 전 움츠린 모양과 닮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운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문을 '미호문' 이라고도 부른다.

문루**는 1978년에 복원하였으나 지반 침하로 변형되어 2015년에 해체한 후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이때 문루에 사용된 수막새***의 문양과 벽돌은 1995년 서장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다.

현재의 서문에서 북쪽으로 약 40m 떨어진 곳에서는 지금의 서문보다 앞서 만들었던 서문 터가 확인되었다. 이 서문 터는 조선 숙종 대와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수축****되기 이전의 상당산성 서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당시 발굴 조사 자료를 토대로 2003년에 정비하였다.

* 암문: 성곽을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사잇문
** 문루: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 수막새: 처마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
****수축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상당산성 서문(미호문)"


"상당산성 서문(미호문)"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상당산성과 우암산"


"상당산성"


[상당산성 서남 암문]

암문은 성을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사잇문이다. 암문은 아군이 적군 몰래 출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축, 양식 등을 나를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상시에는 흙으로 문을 막아 통로를 폐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동북 암문과 서남 암문이 있다.

서남암문은 '남암문', 또는 '남화문' 으로도 불렸으며, 남쪽으로 1.7㎞ 정도 떨어진 것대산 봉수대와 이어진다. 이곳은 남문 밖에 모여든 적의 뒤쪽으로 돌아가 포위하거나, 산성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로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중요한 위치이다. 암문은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고, 문 안쪽에 빗장을 걸었던 네모난 구멍만 남아 있다. 암문 안쪽에는 침투하는 적을 수월하게 방어하기 위하여 좌우측에 벽을 쌓았다.


"서남암문 치성"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격이다. 바깥쪽으로 옹성이나 적대 등 성문을 보호할 시설이 없는 대신 안쪽에 옹벽이 있어서 성문을 드나들 때 반드시 꺾여 드나들도록 해놓았다. 또한 남문 부근에만 치성을 세 곳 두었다. 치성은 성벽 바깥으로 네모지게 내밀어놓은 부분이며 벽면에 바짝 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이다. 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구불구불하므로 따로 치성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지만 상당산성 남문에는 옹성도 없는 데다 남쪽 벽에 거의 굴곡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치성을 두어 보강한 것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구룡사 사적비 (淸州 九龍寺 事蹟碑)]

구룡사사적비는 상당산성 남문 앞에 있는 비석으로 구룡사의 창건과 상당산성의 개축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 40년(1764년) 은재거사(恩齋居士)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건립했다.

비명(碑銘)은 ‘구룡사사적비(九龍寺事蹟碑)’이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해 구룡사가 숙종 46년(1720년)에 절도사(節度使) 이태망(李台望)과 홍서일(洪敍一)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도천(道天)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 건립경위와 1743년에 대방광극락보전(大方廣極樂寶殿)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숙종 42년(1716년)에 절도사 유성추(柳星樞)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의 요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사는 상당산성 서남암문(西南暗門) 안쪽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상당산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적비는 높이 133㎝, 폭 56㎝, 두께23㎝의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가첨석을 얹었다. 좌대는 101x55㎝, 가첨석은85x49x32㎝)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상당산성의 개축과 상당산성 내 사찰의 기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함으로서 상당산성 정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에게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상당산성 치성]

성벽의 바깥으로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내일게 쌓은 것이 치성이다. 적군이 성벽 아래에 바싹 붙으면 성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공격하기 어려우므로 현인(성벽 바닥 가장자리 일부에 구멍을 낸 것)을 만들거나, 비스듬히 볼 수 있게 치성을 만들어 옆에서 공격할 수 있어야 하였다. 

치성의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본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한다. 치성은 전술상 평지 성문의 좌우, 혹은 성벽이 곧게 뻗은 부분에 주로 설치되었다. 

상당산성에는 남쪽 성벽이 곧게 축조되었으므로, 그 양쪽 끝 능선 위에서 성벽이 돌아가는 위치가 되는 남문 동측과 서남암둔 동측에 하나씩의 치성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다. 또 남쪽 성벽의 계곡 방향 경사면에 치성을 두어 성벽이 비탈을 지나는 구조적 약점을 튼튼히 보강하고, 동시에 남쪽 성벽의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이 굴곡을 이룬 서쪽· 북쪽 동쪽 성벽에는 성벽이 계속하여 굴곡을 이루며 굽이 돌거 때문에 따로 치성을 설치하지 않았다.

남문 치성


산성에서 -매월당 김시습 시비

꽃다운 풀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 물였고 / 살진 고사리 비갠 뒤라 더욱 향긋해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 내일이며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니 


[무신창의사적비]

영조 때인 1728년 무신년에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이인좌라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함락하자 청주 유생 열네 명이 의병을 일으켜 진압한 일을 기리는 비이다. 2008년 청주시가 세웠다.


[상당산성과 충청도병마절도사영]

상당산성은 서쪽과 북쪽으로는 금강유역,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유역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이어지는 분수령에 축조된 산성이다. 서쪽 평지에 청주읍성과 정북동 토성이 있고, 주변에 여러 옛 산성들이 있다. 청주는 이처럼 평지의 도심지역과 그 외곽에 역사적으로 변화되어 온 방어 시설을 갖춘 독특한 유형의 도시 구조를가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산성은 가장 위쪽에 자리한다.

1651효종 2년 해미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청주로 옮겨옴에 따라 청주읍성은동시에 충청병영성의 역할을 하였다. 평지에 자리한 병영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상당산성을 크게 수리하여 병영의 배후산성으로 경영하였다.

임진왜란 때 수리를 시작했다가 중지된 상당산성을 1716년(숙종 42)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여 영조 때 완성하였다. 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조대왕의 태실이 있고, 바로 남쪽 건너편에 것대산 봉수가 있다.

1744년에 영휴스님이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이 성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와 산성의 규모· 시설의 변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 구례 운조루에 전해오는 「상당산성도」에는 산성의 시설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영조 때의 「여지도서 선포함,에 따르면 성벽 둘레가 포백척(7,275자), 성벽 높이가 9자이며, 동문· 서문· 남문과 동북· 서남 암문의 성문과 수문, 치성 3곳, 포루15곳, 여장차 1,176첩, 연못 4곳과 우물 15곳, 동쪽·서쪽·북쪽의 장대, 운주헌을 비롯한 관청과 창고 등이 있었다. 또한 사찰로는 구룡사, 남악사, 장대사 등 산성 내에는 모두 300칸이 넘는 기와건물과 초가로 된 민가 마을이 있었다.

이곳의 관리와 군사훈련인 성조 등은 병마우후 가 맡았다. 그 휘하에 군관 30인, 수첩군관학 250인, 승장 1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속해 있으며, 군향미 약 1만5천석, 콩 약 3천석, 군수 장부 150석 등을 비축하고 있었다. 1890년고종 27에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895년의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사적 청주 상당산성 (淸州 上黨山城)]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상당산성 종합안내도"


상당산성남문 버스 정류장에서 청주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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