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

2023. 6. 24. 06:14청주자랑 100가지/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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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이끈 곧은 이를 찾아서"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90호, 독립운동가·역사가·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1978~1979년 사이에 묘역을 정화하며 영정을 모신 사당을 함께 세웠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터에 있다. 묘역에는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석과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유적이 위치한 고드미마을은 녹색마을로 유명하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

출처:청주시


"청주자랑 100가지,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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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행 버스를 타고 귀래리 정류장에 내린다. 단재 신채호 유적지가 있는 고드미녹색마을까지 2.4km 걸어간다.


[고드미 녹색마을]

고드미마을의 유래

귀래리는 본래 청주시 산내 이상면 지역으로 조선 광해군 때 신요라는 분이 곧은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플리어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답니다. 인조가 반정하여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곧으미, 고디미, 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림리, 삼곡리, 도곡리, 문박리 일부를 합쳐 귀래리라 고치고 낭성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귀래리는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어린 시절부터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란 마을로, 1936년 2월에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그 유해를 고향인 이 곳에 안장하였습니다. 현재 묘소를 비롯하여 사당, 기념관이 있으며, 유적지 성역화 계획이 진행 중입니다.

'고드미 장꾼' 이라면 인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말로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1996년에 고드미 한편에 한옥집 다섯 가구가 지어졌고 2004년에는 그 뒷편에 전통문화 체험장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친환경 생명농업

1996년부터 새롭게 무농약 농사가 시작되어 오리농법, 쌀겨농법, 우렁이농법 등으로 무농약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고드미 친환경농업 공동체>는 귀래리와 관정리, 호정리, 미원면 등의 친환경농업 실천농가까지 포함하며 생명농업을 점차 확산시켜 가고 있습니다.


"단재교육관, 단재기념관"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선생님께서 1923년 1월 의열단(義烈團)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하여 천명한 선언서. 5개부분 6,400여자로 되어있다


"단재 신채호선생 영정"


"님나라"


[단재 신채호선생 丹齋 申采浩 1880.12.08-1936.02.21]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언론인이자 역사가, 문학가이며 독립운동가였다.

'내가 죽으면 왜놈들의 발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돌보지 않고 제국주의 지배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조국의 독립을 미처 못 보고 옥중에서 순국했거니와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해방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단재 신채호! 그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다.


"독립에 바친 삶과 죽음 신채호의 길"


"독립에 바친 삶과 죽음 신채호의 길"


"단재 신채호선생의 주요 저서"


"상하이와 베이징의 단재"


"잠시 범부의 삶을 살았던 단재"


"신채호 부인 방문기"


"뤼순형무소에 수감된 단재"


"신채호 선생, 박자혜 여사 건국훈장"


"조선사 연구서"


"뤼순감옥 수형표, 모자"


[단재 선생의 세수법]

단재의 세수법은 단재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단재는 세수할 때 허리과 고개를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냥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고 다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수를 하면 바닥과 옷이 온통 물에 젖어 버리곤 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을 하였다만, 단재는 오히려 "옷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대답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단재의 자존과 절개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였다.


"대한의 희망"


"단재 신채호 선생 영정"


"제막포"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서한문"


"단재 선생의 편지 봉투"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과 사당"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淸原 申采浩 祠堂 및 墓所)]

일제강점기시대 독립운동가·역사가·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사당 및 묘소이다. 

20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주필로서 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

28세 무렵에 이동녕·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등의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旅順)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1978∼1979년 사이에 묘역을 정화하고 이 곳에 사당을 세웠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정면에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 앞에 ‘정기문(正氣門)’이라 이름 붙인 대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설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역에는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석과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단재영각과 단재 신채호 선생 영정"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


미리 알아둔 버스 시간에 맞춰 단재교육관에 들어온 시내버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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