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자랑 100가지, 영조 태실

2023. 6. 21. 05:08청주자랑 100가지/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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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부흥을 이끈 왕"

[영조 태실]

충청북도 기념물 69호, 영조가 태어난 1694년(숙종20) 9월 지금의 자리를 정하고 이듬해 9월 28일 태를 안치하였다. 영조 즉위 후 1729년(영조5)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새로 치장을 더하여 만들었다. 1928년 일제의 훼손 후 1982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태를 묻은 청주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무신란이 일어났으니 기막힌 사연의 현장이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6-1

출처:청주시


"청주자랑 100가지, 영조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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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번 시내버스를 타고 갈산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무성리 뒷산 영조 태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조 태실 오르며 뒤돌아보니 무성리 마을과 산들이 환하게 펼쳐져 있다. 풍수에 문외한 사람이 봐도 명당자리라 부를만하다. 좀 더 오르니 태실과 비석이 살며시 보인다.


"청주 영조 태실"


"청주 영조 태실"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영조 태실 (淸原 英祖 胎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사람 신체 가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특히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나 왕세손 등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영조 5년(1729)에 만든 것으로, 태실의 형태는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대리석 위에 계란모양의 태실석과 팔각의 처마돌을 놓고 8각의 모서리에 기둥돌을 세웠다.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태 항아리만 꺼내 창경원으로 옮기면서 훼손되었던 것을 1982년 청원군에서 갓처마돌이 없는 상태로 복원하였다. 청원군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영조 태실]

이 곳은 조선 21 대 영조(재위 1724~1776)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태어난 이듬해인 1695년(숙종21)에 무성리 뒷산에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인 1729년 영조에 왕의 태실 규모에 맞도록 가봉하였다. 태실 앞에는 「1694년(강희33) 9월 13일 인시에 태어난 왕자 아지씨 태실」이라고 한 초기의 비와, 가봉 후에  「주상전하태실」 이라고 한 태실비가 있다. 

이 태실은 조선 말기까지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일제하에서 항아리를 서울 창경궁으로 옮긴 후 크게 파손되었고 그 자리에는 민묘가 들어섰다. 1982년에 흩어진 석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복원하였다. '아지씨 태실비' 는 1991년 대구의 골동품사에 있던 것을 구입하여 옮겨 세운 것이다. 이 태실을 가봉할 때의 기록문인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 는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조 태실과 아지씨태실비"


[아지씨 태실비]

태실 앞에는 「1694년(강희33) 9월 13일 인시에 태어난 왕자 아지씨 태실」이라고 비석이 있다. '아지씨 태실비' 는 1991년 대구의 골동품상에 있던 것을 구입하여 옮겨 세운 것이다. 


"청주 영조 태실"


"영조 태실과 주상전하태실비"


"영조 태실과 주상전하태실비"


"주상전하태실비"


[영조 태실]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영조 5(1729) 만든 것으로태실의 형태는 중앙에 2단으로  정사각형의 대리석 위에 계란모양의 태실석과 팔각의 처마돌을 놓고 8각의 모서리에 기둥돌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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