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드문 시골마을, 보은 회인면

2021. 6. 14. 05:05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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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회인면]

충청북도 보은 회인면은 과거 현을 이룰 정도로 보은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 현감의 집무공간인 관아, 사직단, 인산객사, 회인 향교, 풍림정사 등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회인 중심지인 중앙리도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작은 시골마을로 변했다. 


"보호수 수령 약 380년 회인면 중앙리 느티나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보은 회인 인산객사 (報恩 懷仁 仁山客舍)]

조선시대에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거나 외국에서 사신이 올 때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시설해 놓은 곳이다.

정당은 1983년에 수리하였는데 이때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효종 6년(1655)에 새로 지어지고, 순조 3년(1803)에 고쳤으며 인산객사로 기록되어 있어 종래의 회인객사 동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배치형식은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으며, 앞쪽에는 중문과 외문 그리고 행랑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에는 정당과 외문만이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2칸으로 가운데 3칸의 정당은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그 옆으로 2칸의 방을 놓아서 가운데 마루와 연결시키고 있다.

회인 인산객사는 전체적인 건물의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특징을 나타내는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보은 회인 인산객사"


[충청북도 기념물 제28호 보은 풍림정사 (報恩 楓林精舍)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박문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원래 이곳은 그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책을 쓰며 후진양성을 하던 곳이었다.

고종 9년(1872)에 지은 것으로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에 ‘풍림정사’라고 쓴 글씨는 송근수가 쓴 것이며 이곳에는 박문호의 문집인 『호산집』의 판본과 목활자 일부가 남아 있다.

풍림정사 뒤쪽에는 후성영당이 있는데 박문호·이이·송시열 등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후성영당은 1906년 세운 건물이며 박문호의 초상화는 1921년 추가로 모신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보은 풍림정사"


"보은 풍림정사"


"보은 풍림정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 보은 회인향교 (報恩 懷仁鄕校)]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세워진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보은향교와 합하였다가 광해군 3년(1611)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대성전·명륜당·내삼문 등이 남아있다.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하는 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오도록 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으로, 1층이 모두 개방된 누문 형식의 특이한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책·노비를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교생초안』·『향교유계안』 등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보은 회인향교"


[오장환 생가와 문학관]

오장환 시인은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안리 140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를 옮겨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되며 문예반 활동을 시작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 「화염」과 같은 시를 발표하고,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37년에 첫 번째 시집 『성벽』, 1939년에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내고 난 뒤에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단 한편의 친일 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두운 시기를 견딘 오장환 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해방의 감격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을 그린 시집 『병든서울』을 발간하며 이 시집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 후보작에 오르는 등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의 시 「절정의 노래」는 중학교 5,6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해방의 혼란기에 오장환 시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길 바라며 지방으로 문화선전활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테러를 당해 치료할 곳을 찾아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후송을 가게 됩니다. 6.25전쟁 와중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34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출처: 오장환문학관 홈페이지

"오장환 생가와 문학관"


"오장환 나의 노래 시비"


"시인 오장환 생가터"


"오장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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