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무농정&방정

2021. 8. 20. 09:50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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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무농정 (淸州 務農亭)]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장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계된 정자의 옛 터이다.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는 폐허화 되고 숙종 14년(1688) 후손 한익저가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었는데, 1949년 후손들이 시멘트로 지었다가 1988년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목조로 다시 세운 것이다. 서쪽에 작은 대문이 있고 4면을 담장으로 둘렀으며 앞뜰 좌측에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대머리공원과 무농정"


"무농정, 석조 쌀가마 표석"


"무농정"


"무농정"


"무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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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정유허비, 무농정재중건비"


"청주 방서동 대머리 청주한씨세거지"


사효각(청주한씨 문중에서 배출한 한준(韓峻), 한사영(韓士英), 한성(韓鋮), 한해점(韓海漸) 등 4명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효행을 기려 세운 정려각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방정 (淸州 方井)]

청주 방서동에 있는 우물로, 우물이 있는 이 마을은 네모난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방정(方井)마을' 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이 살았던 곳으로, 어느해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한란이 3일 동안 기도를 드리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꿈속에 북쪽 장수가 나타나 창끝으로 땅을 찌르자 맑은 물이 콸콸 나왔다. 너무 기뻐 소리를 지르다 깨어나 꿈속에서 보았던 곳을 파니 과연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문중 사람들과 함께 네모꼴로 큰 웅덩이를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이후 부터는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거나 죽지 않았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 수십만군이 이 물을 먹었는데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을 만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1988년 우물보호를 위해 뚜껑과 담장을 새로 정비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청주 방정(청주 한씨의 시조인 한란이 살던 마을에 있던 우물이다. 방정은 그 모양이 네모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던 중 이곳에 주둔했을 때, 이 지역의 호족이었던 한란이 10만의 고려군에게 군량을 제공하고, 이 방정의 물로서 식수를 삼았는데 솟아나는 물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된 머릿돌의 윗부분에 ‘방정’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우물의 뒤쪽의 벽은 둥글게 축대를 쌓았다. 우물 바닥에는 자갈돌을 깔았고, 앞쪽으로는 연못을 만든 흔적이 있다. 우물 근처에는 ‘방정교’라고 새긴 길이 153cm의 돌이 남아 있다. 이 돌로 미루어 방정 곁에는 작은 다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물 이름에서 유래하여 이곳을 ‘방정마을’ 이라 부른다.)

내부에 물은 없으며 잡풀이 자라고 있다.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된 머릿돌의 윗부분에 ‘방정’이라는 글자가 내부 습기로 희미하게 보인다.


청주 방정교가 새겨진 돌(우물 근처에는 ‘방정교’라고 새긴 길이 153cm의 돌이 남아 있다. 이 돌로 미루어 방정 곁에는 작은 다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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