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대표산성, 청주 상당산성

2021. 8. 24. 06:08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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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과 충청도병마절도사영]

상당산성은 서쪽과 북쪽으로는 금강유역,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유역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이어지는 분수령에 축조된 산성이다. 서쪽 평지에 청주읍성과 정북동 토성이 있고, 주변에 여러 옛 산성들이 있다. 청주는 이처럼 평지의 도심지역과 그 외곽에 역사적으로 변화되어 온 방어 시설을 갖춘 독특한 유형의 도시 구조를가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산성은 가장 위쪽에 자리한다.

1651효종 2년 해미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청주로 옮겨옴에 따라 청주읍성은동시에 충청병영성의 역할을 하였다. 평지에 자리한 병영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상당산성을 크게 수리하여 병영의 배후산성으로 경영하였다.

임진왜란 때 수리를 시작했다가 중지된 상당산성을 1716년(숙종 42)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여 영조 때 완성하였다. 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조대왕의 태실이 있고, 바로 남쪽 건너편에 것대산 봉수가 있다.

1744년에 영휴스님이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이 성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와 산성의 규모· 시설의 변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 구례 운조루에 전해오는 「상당산성도」에는 산성의 시설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영조 때의 「여지도서 선포함,에 따르면 성벽 둘레가 포백척(7,275자), 성벽 높이가 9자이며, 동문· 서문· 남문과 동북· 서남 암문의 성문과 수문, 치성 3곳, 포루15곳, 여장차 1,176첩, 연못 4곳과 우물 15곳, 동쪽·서쪽·북쪽의 장대, 운주헌을 비롯한 관청과 창고 등이 있었다. 또한 사찰로는 구룡사, 남악사, 장대사 등 산성 내에는 모두 300칸이 넘는 기와건물과 초가로 된 민가 마을이 있었다.

이곳의 관리와 군사훈련인 성조 등은 병마우후 가 맡았다. 그 휘하에 군관 30인, 수첩군관학 250인, 승장 1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속해 있으며, 군향미 약 1만5천석, 콩 약 3천석, 군수 장부 150석 등을 비축하고 있었다. 1890년고종 27에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마지막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895년의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무신창의사적비]

영조 때인 1728년 무신년에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이인좌라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함락하자 청주 유생 열네 명이 의병을 일으켜 진압한 일을 기리는 비이다. 2008년 청주시가 세웠다.


산성에서 -매월당 김시습 시비

꽃다운 풀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 물였고 / 살진 고사리 비갠 뒤라 더욱 향긋해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 내일이며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니 


[사적 청주 상당산성 (淸州 上黨山城)]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문 설명]

This is a fortress built of the stones found easily around the boundary of this valley.

Originally, it was made fortress of the Baekje Dynasty made with piled up of earth. A citation, from the Samguk 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The construction of a walled city named Seowonsulseong by order of a general, the third son of Kim Yu-sin (a contributing commander-in-chief of the Silla for winning victory in the wars among the three kingdoms). . .”, has some experts and scholars conjecture the building period of the Sangdangsanseong to be the early year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Sangdang is an ancient name of the present-day Cheongju city, and this region was called Sangdang from the time of the Baekje Dynasty.

This fortress had two times experience of reconstruction work in the Joseon Dynasty, one at the time of ending the war against Japan that broke out in 1592 and the other in 1716, the 4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Granite blocks were used in the construction, and the fortress wall remained in good condition but a low fence on the top of the wall has disappeared There would have been five ponds, three Buddhist temples, a government office building and a warehouse in the fortress and now, still, a gate and a low wall remain. The top of the fortress commands a good view, in particularly in the westerly direction, indicating that the political and military purpose of the fortress at that time was the defense of this region from enemy attack.

This has been a position of strategic importance to the national defense since the Baekje Dynasty, and especially in the Joseon Dynasty.

출처:문화재청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

[사적 청주 상당산성]

청주시 동북쪽, 청원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상당산(492m) 위를 두른 산성이다. 충청북도 일대에는 곳곳에 산성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상당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과 함께 충청북도의 대표 산성으로 꼽힌다.

상당산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에 청주가 백제의 상당현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그 시절부터 여기에 토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조선시대까지 상당산성은 누대에 걸쳐 수축·개축되면서 청주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청주는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이 되었고 경덕왕 16년(757)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더불어 상당산성의 구실도 더욱 커졌을 터인데, 산성 남문 밖에서 ‘사량부’라는 신라 6부의 하나가 적힌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 때 이곳에 관리와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상당산성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임진왜란중에 원균이 충청병사로 있을 때 수축한 적이 있고(1592) 숙종 42년(1716)부터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군이 이곳을 점령했다가 관군에게 궤멸된 후 상당산성 경영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영조 7년(1731)에 남문의 문루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보수를 했고,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수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는 가운데 옛 상당성의 성벽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완벽한 산성의 격식이 갖추어졌다.

산성은 평지의 읍성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곳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항전을 벌이는 최후의 보루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읍성에 있었고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가 수성장으로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에는 남·동·서의 세 문과 수문, 암문과 동장대·서장대, 산성의 지휘관이 거처하는 관사와 여러 부속 건물, 창고, 구룡사와 남악사라는 두 절, 청심암이라는 암자, 승군 창고, 연못 다섯 군데와 우물 열다섯 개가 있었다. 영조 때는 주둔군이 모두 238명이었고 비축된 양곡은 5,000석 가량이었다. 성안에 절이 있었던 것은 성을 꾸리는 데 필요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승군이 상주했기 때문이다.

그후 문루가 모두 없어지고 성벽도 퇴락했으나 1971년부터 성벽과 누문이 복원, 수리되고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의 둘레는 4.2㎞쯤 되며 오목한 분지를 싸안고 등성이를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바깥벽을 쌓았고 성벽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져놓았다. 옛 성벽이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3m에서 4m에 이른다. 성벽 위에 설치했던 성가퀴(여장,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는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으로 미석(성벽과 성가퀴 사이에 납작한 돌을 끼워 눈썹처럼 튀어나오게 해놓은 것)만이 남아 있었으나 복원된 문루 주변에 성가퀴도 복원되었다.

지금 남아 있거나 복원된 성곽시설은 남·동·서의 세 문, 세 개의 치성, 동북쪽과 서북쪽 성벽의 암문 두 개, 장대 두 곳이며 포루 자리가 열다섯 군데이다. 5만 4,700여 평에 이르는 성안에는 논도 있고 큰 저수지도 있으며 민가가 40여 채 있어 산성 동동주나 토종닭 등을 파는 음식점을 열고 있다. 동문과 남문 사이의 가장 바닥이 낮은 곳에 있던 수문은 오래전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사라졌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격이다. 바깥쪽으로 옹성이나 적대 등 성문을 보호할 시설이 없는 대신 안쪽에 옹벽이 있어서 성문을 드나들 때 반드시 꺾여 드나들도록 해놓았다. 또한 남문 부근에만 치성을 세 곳 두었다. 치성은 성벽 바깥으로 네모지게 내밀어놓은 부분이며 벽면에 바짝 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이다. 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구불구불하므로 따로 치성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지만 상당산성 남문에는 옹성도 없는 데다 남쪽 벽에 거의 굴곡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치성을 두어 보강한 것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상당산성 남문 치성"


"상당산성 수문지 발굴유구, 보화정.동장대"


[상당산성 수문지 발굴유구]

본 발굴유구는 상당산성 수문을 구성했던 석재들이다. 수문자리에서는 석축유구, 축벽시설, 배수유도 석축과 다수의 수문을 구성했던 다듬은 석재와 성들이 확인되었다.

이 일대에 상당산성의 수문이 있었지만 이미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만들어진 수구는 특별히 고안된 구조로 축조되었다 하며, 남은 석재들로 보아 2층 구조의 수문이었다고 추측된다.


"상당저수지"


[상당산성 보화정.동장대]

조선시대 후기에 상당산성을 수축하여 충청도병마우후가 항상 주둔하여 치키는 곳이 되었는데, 지휘소인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어 서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건물과 관련된 1747년(영조 23)에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필구가 지은 보화정기의 글이 남아 전해온다. 동장대는 6칸 규모의 건물로 상당산성도에도 보화정이 그려져 있고 건물 이름도 보화정이라 기록돼 있다.

동장대는 이미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당초 있었던 자리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던 주춧돌 사이의 간격이 포백척(베의 길이 등을 재던 자)으로 환산되므로, 이 수치를 기준으로 복원하였다. 상당산성의 대대적인 수축 공사의 맨 마지막에 완성된 건물로 낙성과 관련된 거록이 남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구룡사 사적비 (淸州 九龍寺 事蹟碑)]

구룡사사적비는 상당산성 남문 앞에 있는 비석으로 구룡사의 창건과 상당산성의 개축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 40년(1764년) 은재거사(恩齋居士)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건립했다.

비명(碑銘)은 ‘구룡사사적비(九龍寺事蹟碑)’이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해 구룡사가 숙종 46년(1720년)에 절도사(節度使) 이태망(李台望)과 홍서일(洪敍一)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도천(道天)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 건립경위와 1743년에 대방광극락보전(大方廣極樂寶殿)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숙종 42년(1716년)에 절도사 유성추(柳星樞)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의 요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사는 상당산성 서남암문(西南暗門) 안쪽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상당산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적비는 높이 133㎝, 폭 56㎝, 두께23㎝의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가첨석을 얹었다. 좌대는 101x55㎝, 가첨석은85x49x32㎝)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상당산성의 개축과 상당산성 내 사찰의 기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함으로서 상당산성 정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에게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상당산성 서남 암문]

암문이란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이다. 성벽의 바깥 산 아래에서 드나드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곳에 만든다. 이곳으로 아군이 사람과 가축 및 식량 등을 성안으로 몰래 들여오거나, 적군 몰래 아군을 내보내 성 밖과의 연락을 하거나, 적이 뒤쪽으로 출동하기 위해 나가는 용도로 만들었다.

암문의 응급적인 방어력을 높여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곧장 폐쇄할 수 있도록 문의 안쪽에 흙더미와 돌을 쌓아두기도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동북 암문과 서남 암문의 두 암문이 있다. 서남 암문은 혹은 남화문 이라불렸다.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약 1.7km 남쪽의 것대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위치이며, 남문 밖에 모여든 적군의 후방으로 나가 포위하거나, 산성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로 주변을 관찰하기 위해 통행이 가능한 곳에 자리하였다. 암문의 규모는 너비 약 166cm, 높이 약 172cm이고 구조로 보아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문을 닫도록 되어 있었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청주시 전경"


[상당산성 제승당.서장대]

상당산성의 서장대는 서쪽 성벽의 안쪽 높은 봉우리에서 동쪽으로 낮아진 위치에 자리하였다. 건물은 동쪽을 향하여 정면을 두고, 멀리 낮은 위치의 동장대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된다. 앞에 평지를 만들어 군사들의 점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페허가 된 건물 터를 1995년 발굴조사 하여 크기가 6칸이라고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과 부합되는 규모임이 확인되었다. 건물의 남아있는 기초를 원상대로 보존하다가 2014년에 복원하였다. 주춧돌은 앞쪽은 네모꼴, 중간과 뒤쪽은 둥근 것을 사용하였다.

서장대의 건물 이름은 제승당이다. 바닥에 벽돌을 깔고, 지붕에 막새기와를 사용한 점에서 매우 높은 등급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초 사용되었던 막새기와가 남문 밖의 기와가마에서 구워진 사실도 알려져, 이를 토대로 당초 사용된 기와로 복원하였다. 상당산성도에 그려진 제승당이 기록돼 있다.


[상당산성 서문.미호문]

서문은 조선후기에 대대적으로 고쳐쌓으면서 새로 만들어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땅모양이 호랑이가뛰기 전 움츠린 모양으로,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운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세우고 미호문이라 하였다. 이는 서문의 위치가 산성을 기준으로 우백호에 해당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상당산성에는 동문· 서문·남문의 성문이 있고, 동북과 서남에 각각 암문이 있다.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아래위 2개의 무사석 위에 장대석을 올려 만든 평문구조로 되어있다. 서문은 3곳의 성문 가운데 가장 특이한 평면을 가지고 있는데, 성밖으로 좌우에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옹벽을 만들고, 문안에서 왼쪽으로 휘어 돌아 문루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흔히 암문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서문에 이를 응용하여 비용을 줄이고 전술 효과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문루는 1978년 복원 후, 지반이 침하되어 변형이 일어나 2015년 해체 후 원형 복원하였다. 사용된 수막새 문양과 벽돌은 1995년 서장대 발굴조사 중 나온 조선 후기 양식을 따랐다.미호문에서 바깥으로 38m 떨어진 곳에 옛 서문 자리가 남아있다. 문길의 길이는 590cm이고 측벽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옛 서문 유구는 발굴조사 자료를 토대로 2003년도에 정비하였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치성, 북한 무장간첩 김동식 공작장비 비빌 매설장소(드보크)


"상당산성 서남 암문"


[상당산성 치성]

성벽의 바깥으로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내일게 쌓은 것이 치성이다. 적군이 성벽 아래에 바싹 붙으면 성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공격하기 어려우므로 현인(성벽 바닥 가장자리 일부에 구멍을 낸 것)을 만들거나, 비스듬히 볼 수 있게 치성을 만들어 옆에서 공격할 수 있어야 하였다.

치성의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본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한다. 치성은 전술상 평지 성문의 좌우, 혹은 성벽이 곧게 뻗은 부분에 주로 설치되었다.

상당산성에는 남쪽 성벽이 곧게 축조되었으므로, 그 양쪽 끝 능선 위에서 성벽이 돌아가는 위치가 되는 남문 동측과 서남암둔 동측에 하나씩의 치성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다. 또 남쪽 성벽의 계곡 방향 경사면에 치성을 두어 성벽이 비탈을 지나는 구조적 약점을 튼튼히 보강하고, 동시에 남쪽 성벽의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이 굴곡을 이룬 서쪽· 북쪽 동쪽 성벽에는 성벽이 계속하여 굴곡을 이루며 굽이 돌거 때문에 따로 치성을 설치하지 않았다.


"상당산성 동문"


[상당산성 동북 암문]

암문은 작게 만든 사잇문으로 적군에게그 위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다. 상당산성에는 남문과 동문 및 서문의 세 대문이 있고, 서남암문과 이곳 동북 암문이 있다.

상당산성의 북쪽 성벽에는 성문이 없고 동쪽 성벽에는 수문과 동문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다. 성의 안쪽과 바깥으로 통하는 능선이 남쪽으로 이어진 곳에 서남 암문이 있듯이 북동쪽의 능선으로 이어진 위치에 동북 암문을 만들었다. 이 암문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드나드는 곳일 뿐만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로 나가서 에워쌀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마련하였다.

규모는 정면의 너비 약 137cm, 높이 162cm이고, 안쪽에서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막는 구조이다. 특히 이 암문의 안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암문을 만든 책임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1728년(영조 4)의 무신란(이인좌의 난)때 성문을 열고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이 있어 사실을 실증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암문을 만든 책임자 이름이 새겨진 돌이 보인다.


[상당산성 북쪽 수구]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시설을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 장치로 남문과 동문 사이에 수문이 설치되어 많은 성안의 물을 내보냈으나, 수문으로 몰려들지 않는 곳의 물을 내보내기 위해 서쪽 성벽 두 곳과 북쪽 성벽에 한 곳의 수구를 만들었다.

북쪽 성벽의 수구는 북쪽 성벽이 작은 계곡물을 모아 내보낼 위치에 성벽 중간을 통과하는모양으로 만들었다. 성벽 안쪽으로 모여든 물이 모아져 나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이 성벽 바깥으로 나가는 배수로는 성벽 속으로 도랑을 낸 것이다.

바깥에서 보면 수구는 정면이 네모꼴이며 성벽 증간에 있다. 바깥의 낙수면 아래, 즉 성벽 바깥은 돌 다짐 위에 기단석을 두고 약 28cm 안쪽으로 들여서 성벽을 5층 약 120cm 높이까지 축조하였다. 수구 바닥에는 너비 80cm, 두께 16cm의 넓은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너비 32cm 공간을 두고 높이 34cm 크기로 수구를 둔 위쪽에 너비 75cm, 두께 18cm의 뚜껑들을 얹었으며 그 위로는 다시 성벽을 쌓았다. 수구의 안쪽은 길이 200cm, 너비 34cm, 높이 35m 크기의 배수로이다. 배수로 바닥 역시 판석을 깔고, 옆면은 좌우 한 총씩 벽석을 두고 위에 뚜껑들을 얹어 밖으로 약 15도의 경사를 이룬다. 이 배수구에 이어지는 안쪽에 너비 250cm, 길이 210cm 크기의 타원형 석축이 있어서 이곳에 모인 물이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상당산성 포루터]

포루는 성벽 안쪽에서 밖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기 위해 방어하기에 긴요한 곳에 만든 군사시설이다. 건물을 지어 만든 집 모양을 한 것을 포루라 하고, 성벽에 포혈을 만들고 화포를 배치한 것을 포대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15곳에 포루를 만들었는데, 평균 대략 240m 간격으로 하나씩을 둔 셈이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상당산성도에는 대략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만큼 2칸 혹은 3칸 규모의 작은 기와지붕의 건물로 표시되어 있다.

승려 영휴가 지은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서기 1725년(영조 1년)에 포루를 지었다고 하였다. 지금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밖의 계곡을 향한 관찰이 쉬운 곳 여러 곳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되는 곳이 있어 포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북쪽 성벽에서 발굴조사되어 확인된 포루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 기초가 남아 있었다.


[것대산 가는 길 출렁다리와 어르신 나무]

어르신나무란? 수령이 오래되어 그 자태가 웅장하고 으뜸이 되는 나무를 "어르신나무” 라 부릅니다. 긴 세월동안 맑은 산소와 시원한 그늘을 준 어르신나무를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더욱 아끼고 보호합시다.


"장승과 솟대"


"상당산성 옛길, 청주시 전경"


"다람쥐, 매미, 달팽이 조형물"


"명암정, 상당산성 옛길"


"상당산성 옛길 반사용 거울"


"만남의 소나무"

상당산성 옛길 만남쉼터, 가지가 서로 만나는 연리지 소나무


"상당산성 옛길 표석"


명암약수터(주변에 붉은 황토빛 흔적이 있다. 철분 함량이 많은 탄산천의 흔적이다. 지금은 식수로 적합하지 않아 폐쇄되었다.)


[죽어가는 목숨 살린 명암약수]

신혼초부터 악질에 시달린 초순 이라는 여인이 마침내 죽음에 이른무렵 천수사 스님으로부터 동북간 범바위이란 곳에 맑은 산골이 있으니 수양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고 그곳에 머물러 청수를 마시고 목욕을 한지 20일 만에 이름모를 병질에서 벗어나 생기를 얻었다는 데서 많은 질병환자들이 이곳에 찾아 효엄을 얻어 신비로운 약수터라는 소문이 퍼져 오늘에 이른다.

이같은 유래를 지닌 명암약수터는 1920년대초 개발되었는데 탄산천으로 철분함량이 많아 주로 위장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효엄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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