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묘와 성균관

2021. 11. 1. 09:01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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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文廟와 成均館)]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존경각과 향관청, 비천당, 계성사가 있으며, 남쪽 좌우에 유생들이 살면서 글을 읽던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 있다. 동재 동편에는 식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창고, 육일각, 잡사가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교의 중심지로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영문 설명]

Munmyo was a shrine that preserved Confucius, the founder of Confucianism.

Munmyo was divided into two: Daeseongjeon Shrine for the memorial services and Myeongnyundang Lecture Hall for study. It was first built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1398) of Joseon but was burnt down in the 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Jeongjong (1400). It was restored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ng, only to be burnt down agai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present building was rebuilt after the Japanese Invasion.

Daeseongjeon and Myeongnyundang were separated into south and north by the wall in the middle. On the north of Daeseongjeon Seou (Treasure No.141) were a storage where various tools for memorial services were placed and another storage where various items were kept. Around Myeongnyundang, the Jongyeonggak, Hyanggwancheong, Bicheondang halls and Gyeseongsa Shrine were placed, with Dongjae and Seojae -- where scalars stayed and read books -- placed from north to south. On the eastern part of Dongjae was a restaurant, with the storehouse, Yugilgak (repository for bows and arrows), and storage room for various items next to it.

Munmyo, where memorial services were performed and Confucian scholars gathered and studied as the center of Confucianism, serves as an important material for studying the architectural history.


하마비와 탕평비각(비각 안의 탕평비는 1742년(영조 18)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지나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영조가 직접 쓴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비문은 "두루 사귀어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뜻이다.

비각 오른쪽의 하마비에 새겨진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종묘나 궁궐의 문 앞 등에도 하마비가 세워졌다.)


삼문(서울 문묘(성균관)의 정문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과 은행나무


하연대(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곳이다. 하연대 왼쪽의 커다란 동삼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었다.)


진사식당(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록청(성균관 소속 정3품 이하의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향관청(향관청은 원래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나, 주로 제사 업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사무실 및 공관 역할을 하였다. 향관청 좌우에 있는 동월랑과 서월랑은 성균관의 감사를 담당하는 감찰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존경각과 육일각(장격각은 문묘의 장서들을 보관하던 건물이며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곳이다.)


[보물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동무·서무·삼문·명륜당> (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東廡·西廡·三門·明倫堂>)]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서재는 기숙사 공간이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영문 설명]

Munmyo Confucian Shrine was built in 1398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of Joseon Dynasty) but was burnt down in 1400 (the 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Jeongjong). Despite being rebuilt in 1407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ng), it was burnt agai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had to be rebuilt anew.

Munmyo Confucian Shrine is mainly divided into Daeseongjeon Hall -- including the Dongmu and Seomu shrines where ancestral rites were held -- and Myeongnyundang Hall including Dongjae and Seojae (East and West Halls) where students studied.

The construction of Daeseongjeon Hall took 2 years from 1601 to 1602 (the 34th to 35th years of the reign of King Seonjo of Joseon). The mortuary tablets of four Chinese Grand Masters (Confucius, Mencius, Yanzi, and Zisi) and of the Ten Wisest, the Six Wise Men of the Song Dynasty, and the eighteen Confucian Grand Masters of Korea are enshrined in Daeseongjeon Hall. It has 5 rooms in front and 4 on the side as well as hip and gable roof. The sidewalls and the foot of the back wall were made with bricks. The Dongmu and Seomu shrines, where the mortuary tablets of Confucius's disciples and some Grand Masters of China and Korea are enshrined, are located in front of Daeseongjeon Hall. They were built from 1603 to 1604 (the 36th and 37th years of the reign of King Seonjo). The wall dividing Daeseongjeon Hall and Myeongnyundang Lecture Hall starts from the end of the Dongmu and Seomu shrines. Located on the rear side of Daeseongjeon Shrine, which was built in 1606 (the 3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Myeongnyundang Lecture Hall consists of a central hall and two wings on the right and left of the building. Jungdang (central hall) is a gable-roofed building, while wings with the half-hipped roof, which are built at a lower height than that of the central hall, indicate the hierarchy of the buildings. The height of the roof and the eaves is appropriate, and the whole balance of the building is excellent as characteristic of Korean construction. Facing Myeongnyundang Lecture Hall, Dongjae and Seojae, which are dormitory buildings arranged in the south and north, are well-known as Seonggyungwan.

Munmyo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held ritual ceremonies for Confucius as well as grand masters as the educational institutes of Confucian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y have traditional and historical value as materials for the research on the history of the construction of Korea.

출처:문화재청


명륜당과 그 주변(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 공간이다. 1398년(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명륜당(서울 문묘(성균관)에 있는 건물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강당이다.)


단풍든 느티나무와 동재·서재(서울 문묘(성균관)의 강학 구역에 있는 성균관 유생들의 숙소이다.)


[천연기념물 서울 문묘 은행나무 (서울 文廟 銀杏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영문 설명]

Found in Japan, China and Korea, the gingko tree was introduced to Korea along with Confucianism and Buddhism from China. In fall it produces beautiful leaves that are resistant to insect damage. As ginkgo trees provide broad leafy shade, they are often planted in arbors or by roadsides.

This 400-year-old ginkgo tree is located around Myeongnyundang lecture hall of Munmyo Confucian Shrine near Sungkyunkwan University. It is about 26m in height and has a girth of 12.09m. The tree has nicely spread branches, and is notable for its well-developed yuju (a deformed root shaped like knots).

It is presumed that the tree was originally planted when the Munmyo Confucian Shrine was rebuilt in 1602, having been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ginkgo tree at the Munmyo Confucian Shrine in Seoul has been well preserved for several centuries, making it an important material for biology research. It has been designated as Natural Monument (No. 59).

출처:문화재청


"서울 문묘 은행나무"


전사청(서울 문묘(성균관)에 있는 건물로,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보관하던 곳이다.)


수복청과 제기고(수복청은 문묘를 관리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주하던 곳이고 제기고는 제향에 필요한 도구들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대성전과 그 주변(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이다. 남쪽의 삼문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 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다.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 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진다.)


대성전(서울 문묘(성균관) 제향 구역의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삼문(서울 문묘(성균관)의 정문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과 서무·동무(공자의 제자와 중국 현인들의 위패를 모셨던 공간이다.)


묘정비각(서울 문묘(성균관)의 연혁을 기록한 묘정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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