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2021. 11. 8. 07:55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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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8월 15일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조선왕실의 보물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관했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에 화려하게 개관을 하게 됐다.

이처럼 10년간의 긴 덕수궁 시대를 마치게 된 국립고궁박물관의 새 보금자리는 덕수궁 시대보다 전시공간은 3배, 수장 공간은 30배가 넓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에 따라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서울문화포털


14시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조선의 국왕, 임금의 자리(어좌, 일월오봉도, 용무늬 항아리와 꽃)


왕권의 상징물 어보


임금님의 글씨, 어필각석


[국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태백산사고 실록각 현판

국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오대산사고는 1606년(선조 39) 경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들이 모두 소실되자 조선정부는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재간행했다. 그리고 강화·태백산·묘향산·오대산 등지에 사고를 새로 건축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함께 5곳의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당시 실록을 재간행할 때 4부 중 3부는 정본(正本)으로 인쇄했지만, 전란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나머지 1부는 정본 인쇄를 하지 못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이 교정쇄본이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다. 따라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태조~명종실록은 교정쇄본이고 이후에 소장된 선조~철종실록은 정본이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된 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사고본실록 47책(2007. 2. 26. 국보 추가지정)이 2006년에 환수되었고,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이 2018년 환수되어 총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문 설명]

Joseon Wangjo Sillok comprises of 1,893 books and 888 volumes covering 472 years (1392-1863) of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in a chronological order, from the reign of King Taejo, the founder, to the end of the reign of King Cheoljong.

The contents of these annals are encyclopedic, including general state affairs, economy, culture and politics. They are also highly reliable records with historic authenticity and credibility. Historiographers were legally guaranteed independence in their record keeping and the right to keep secrets. After a king's death and the coronation of his successor, professional officials were appointed to write the annals of his reign at the Sillokcheong, the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Nobody was allowed to read the sacho, or draft history, not even the king. Once the annals were compiled in multiple copies, each copy was stored in special archives. Up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most of the copies stored at archives in Taebaeksan Mountain, Jeongjoksan Mountain, Jeoksangsan Mountain and Odaesan Mountain survived, even after the massive destruction by the Japanese Invasion (1592-1598) and the Qing Invasion (1636-1637).

The Odaesan Edition consists of 27 volumes. Annals covering the period from the reigns of King Taejo to King Myeongjong are one of the four copies transcribed from the Jeonju Archive's edition from July in the 36th year of King Seonjo (1603) to March of the 39th year (1606). Then, newly compiled annals were continuously updated till the Annals of King Cheoljong was published in the second year of King Gojong (1865). From the 39th year of King Seonjo (1606) to 1910, they continued to be preserved at the Odaesan Mountain archive. The copies were taken to Tokyo University, Japan during the Japanese Imperial Regime to be mostly lost amid the Kanto Earthquake in 1923. Among them, 30 volumes are preserved at the University of Tokyo, and only 27 volumes were moved to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출처:문화재청


경회루 연못 출토 청동용(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의 사신이 방문했을 때 연회를 열기 위해 사용하던 장소이다.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주역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고 한다. 1997년 11월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중 경회루 북쪽 하향정 앞 연못 바닥에서 청동용이 발견되었다.)


청기와 용머리 장식(조선 창덕궁 선정전 수습)


수라간


철제로 만든 제과형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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