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토성&용샘&서동생가터

2021. 12. 16. 05:45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반응형

[사적 익산 토성 (益山 土城)]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오금산성(五金山城) 또는 보덕성(報德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시기는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볼 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남문이 있던 자리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도록 했던 수구자리, 그리고 건물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있다.

전해지는 자료에 의하면, 보덕성이라는 이름은 보덕국(報德國)의 왕 안승(安勝)이 670년 익산에 자리잡은 뒤 684년까지 세운 보덕국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1980년대에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흙으로 만든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으로서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것들로 구분되나, 백제 말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견된 유물들을 볼 때 이 성은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성의 부근에서 청동으로 만든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성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영문 설명]

Surrounding a small valley to the south of the top of Ogeumsan Mountain, this fortress wall was made with earth and stone.

Judging from the relics found here, the wall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in between the late 6th and in the early 7th centuries.

It is called the wall of Ogeumsanseong or Bodeokseong; at present, there remain the site of the southern gate, the site for a streamlet to run below the wall gate, and the building site remain.

According to a report, there is no particular reason for the use of the name ‘the wall of Bodeok’ because King Anseung of the Bodeok settled down in Iksan in 670 and made it a capital of the Bodeok until 684.

The relics found after the two excavations are mostly pieces of bowls and pieces of tiles made of earth. Those are classified into the late Baekje Era, the Unified Silla Era, and the Goryeo Dynasty. However, the main kinds of them are belonged to the late Baekje Era. Judging from the excavated relics, this wall seemed to have been built during the expansion period of Baekje and used for a long time. Also around the wall the Bronze relics were also found around the wall, which making it more valuable.

출처:문화재청


"익산 토성 남문지"


 "쌍릉 방향 전경"


"익산 토성 서문지"


"금마 방향 전경"


"용샘과 오금산.익산 토성"


용샘(용샘은 마룡지와 서동모의축실지(서동생가터)에서 서북쪽으로 300여m 거리에 위치한 샘터로 마룡지에서 오금산으로 가는 논 가운데에 위치한다. 용샘은 서동(백제 30대 무왕의 어릴적 이름)이 어려서 사용하던 샘으로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원래 모습에서 크게 변형된 상태이다. 용샘은 원래 160여m2 규모로 방형 웅덩이 북쪽에 토관을 묻어 샘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샘 주변에는 가공된 돌로 우물 정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메워져 논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에 콘크리트로 만든 우물통이 남아 있어서 우물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용샘(쌍릉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옆 논 가운데에, 일명 용샘이라고도 하는 마룡지 자리가 있다. 나중에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어머니가 이 못가에서 혼자 살다가 못의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깃들인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금산 남쪽 백여 보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이곳에 와서 함께 살다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지금은 한쪽에 우물이 있고 한 변의 길이가 10m, 다른 병의 길이가 6m 가량 되는 네모꼴 늪으로 남아 물풀이 우거져 있다.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따로 마련한 것으로 속에 파이프를 박아 농업용수로 쓰는 모양이다. 우물 옆에는 자그맣게 빨래터도 있어서 돌과 시멘트에 비누자국이 묻어 있다. 1,300년 전 백제 무왕의 사연이 얽힌 이 못은 이제 동네 사람들의 생활 속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들어 있는 것이다.)


서동생가터(서동생가터는 금마사거리에서 서측으로 500여m 거리의 722번 국도와 연동제 사이에 위치해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의하면 ‘연못가에 홀로 집을 짓고 살던 여인이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해 서동을 낳았다’고 전한다. 1980년대 초, 주변의 건축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생가터 일대의 흙을 채취하면서 백제 기와편과 초석이 다수 발견되었다. 2011년에도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같은 종류의 토기편(뚜껑)이 연못(마룡지)둑에서 수습되어 ‘서동생가터’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 출처:익산시청)


서동탄생설화("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 사람들이 서동이라 했다" - 삼국유사 무왕조)


서동모와 지룡 조형물이 무왕이 건립한 백제 왕궁(왕궁리유적)을 바라보고 있다.


"마룡지와 오금산.익산 토성"

728x90
반응형

'바롱이의 쪽지 > 전라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 보석박물관&함벽정  (0) 2021.12.18
사적 익산 쌍릉  (0) 2021.12.17
익산 성당포구마을  (0) 2021.12.15
정읍 천곡사지 칠층석탑  (0) 2021.08.19
정읍 동학혁명모의탑  (0) 2021.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