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2022. 1. 11. 05:21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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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예천군에 위치한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2017 우리나라 걷기여행축제" 봄 프로그램 13개중 한 곳으로 선정된 곳이다.

연안 마을에는 동래정씨 입향조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조선 세종 7년(1425)에 지은 정자인 삼수정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으며 낙동강 생태숲길을 따라 걷다 마주하게 되는 쌍절암은 임진왜란 때 왜병을 피해 동래정씨 집안의 두 여인이 손을 잡고 절벽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해 정절을 지켰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전망대와 관세암에서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예천 청곡1리.별실 마을 표석"


왜가리 서식지(동네 할머니 말씀으론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왜가리가 찿아 왔으나 왜가리 배설물에 나무들이 고사 한 후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와 우망마을


[예천 삼수정]

동래정씨 입향조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조선 세종 7년(1425)에 지은 정자이다. 인조 14년(1636)에 헐렸다가 순조 29년(1829)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다. 이후 세 차례 옮겨 지어졌다가 1909년 다시 옛터에 중건되었다.

풍양면 연안마을의 강변 구릉 정상부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정자와 그 앞의 사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담장은 없다. 사주문 앞에 노거수가 있고 오른쪽 아래로 소나무 세 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전체를 마루로 구성하고 전면을 제외한 3면은 판벽을 두르고 울거미널문을 달았다. 중앙 후칸에 단칸의 마루방을 꾸미고 있어 영남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평면 구성이다. 기단 없이 막돌초석 위에 중앙과 측면의 중간에만 둥근기둥을 쓰고 나머지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사주문도 기단 없이 막돌초석 위에 세웠으며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혼용한 삼량가의 박공지붕 건물이다.

풍광 좋은 자리에 앉은 정자로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지니고 있으며, 가운데 마루방을 둔 독특한 평면 형식은 예가 흔치 않아 희소가치가 크다.

출처: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예천 삼수정 (醴泉 三樹亭)]
삼수정은 낙동강이 굽이도는 연안 마을 등성이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초창은 1420년대이나 1636년에 폐하였다가 다시 중건하였다. 1827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 후 세 차례 이건하였으나 1909년에 구기(舊基)에 다시 돌아와 중건되었다. 또한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지니고 있으며, 가운데 마루방을 둔 평면형식은 아주 드문 예로 희소가치가 크다.
출처:문화재청


"삼수정과 회회나무 위 새 한마리"


"우망마을과 4세7현 사적비"


밭에 물 뿌리시는 할머니와 삼수정(불에 타 죽은 소나무 흔적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다시 삼수정으로 올라 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수정이 불타면서 회회나무도 죽었는데 1829년(순조 29) 경상도 관찰사 정기선이 중건하고 난 후 한 그루에서만 움이 돋아 자란 것이 현재의 회화나무로 추정된다.

삼수정 주변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으나 맨 오른쪽 한그루가 불에 타 고사하였다. 보호수 수령 250년 소나무, 불에 타 고사한 소나무, 보호수 수령 300년 회화나무 등이 보인다.


삼수정 주변에 심어진 3그루 소나무 중 불에 타 고사하여 베어 버린 소나무의 흔적들이 보인다.


"삼수정"


"우망마을,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낙동강"


"동래정씨 집성촌 우망마을"


"삼수정"


"낙동강 관세암 방향 전경"


"코끼리바위"


"쌍절암 전망대와 삼수정 방향 낙동강 전경"


"대동정과 쌍절암"


[쌍절암]

쌍절암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 곳 동래정씨의 집성촌에 침범하여 음역 5월 2일에 당시 사재감 참봉 정영후의 부인 청주 한씨와 시누이 처녀가 따라오는 왜병을 피하여 손을 맞잡고 절벽 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하여 정절을 지킨 곳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정려를 지으라고 조서를 내려 27면 뒤 1619년(광해군 11년) 전 대사성 정경세가 비문을 짓고 전 경성판관 조우인의 글씨로 쌍절각을 지어 우망 동리 앞에 세워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두 송이 연꽃이 함께 꺽인 이 바위에 쌍절암이라 각자하여 지나고 보는이로 하여금 숙연히 옷깃을 여미게 한 곳이다.


[대동정, 대동산의 유래와 역사]

낙동강 상류 산자수려한 이곳 태동산은 우리말로 한골미라고 불리는 곳이다. 한골미는 한골뫼 ' 즉 ‘큰 골짜기 산' 이란 뜻으로 원래 명칭은 대동산이나 후대에 온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하게 되는 산이란 뜻의 대동산으로 개칭되었다.

대동산 자락 말머리 바위또는 마당바위에 우망리 동민들의 건의와 예천군의 예산지원으로 2016년 12월 대동정을 건립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낙동강을 조망할수 있는 정자를 건립하려는 염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역사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동산은 1592년 임진왜란때 마을사람들의 피란처 이기도 하였다. 호군공 낙빈 정지( 1563-1642)가 임란 때 두 조카(매오·석문 양공)를 이곳 대동산에 안전하게 피난시켜 후일에 큰 유학자로 성취시키고, 가문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 대동산 덕분이었다.


"대동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대동교와 물개바위"


"낙동강과 자라바위"


"관세암"


"다람쥐"


"멧돼지바위, 큰바위얼굴, 한반도(분단)바위"


 "낙동강 전망대"


"낙동강 전망대 파노라마 전경"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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