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소백산 용문사

2022. 1. 14. 06:20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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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소백산 용문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천군 산천조에서는 용문산을 이르기를 “신라 때에, 고승 두운(杜雲)이 이 산에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용문산 이름의 유래다.

두운은 두운동 태생의 사람으로 속성은 신씨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두운암이라는 암자를 내고 있었으니 신라 경문왕 10년(870)의 일이다. 이때는 신라 하대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다. 한편으로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일어서서 이름하여 후삼국이 쟁패를 벌이기도 했다. 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고 한다. 그것이 실제의 일이었다고 할 순 없으나, 왕건이 문경을 비롯하여 이 근방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기록에도 전하는 일이다. 용의 환영이었건 이 지역민의 환영이었건 아무튼 그것이 큰 힘이 되었던 듯 왕건은 935년에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인 936년에 옛일을 생각하고 절을 크게 일으켜주었다. 그때부터 용문사는 고려 왕조 내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며 번창의 길을 걸었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하였고 의종 때인 1165년에도 왕명으로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명종 때인 1171년에는 절문 밖 왼편 봉우리를 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으로 정하여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이때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 이래 다시 무신들을 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아 정치 정세가 어수선한 때였다. 1173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용문사에서는 3만 승려를 모아 대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두운의 법맥은 고려시대를 통해 영련·조응·자엄으로 이어졌다.

척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많이 받은 편이다. 세조 3년(1457)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현재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종 9년(1478)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이곳에 안장하였으며 조선 후기인 정조 7년(1783)에 와서도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했다. 그러다 조선 말기인 1835년 이후부터는 불에 타버려 전각을 다시 세운 기록이 여러 번 된다. 특히 1984년에는 보광명전·해운루·응향각·영남제일강원·요사·종무원 등 건물이 230평이나 타버렸다. 전각들을 새로 세우면서 용문사의 사역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바람에 주변의 나무들을 쳐내고 절 마당을 넓게 닦아내어, 조선시대의 학자 서거정이 이 절을 두고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라고 했던 때의 아늑함과 포근함은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문사는 보광명전이 본전이지만, 연륜은 그 동쪽에 있는 대장전이 높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응향각·원통전·산신각·천불전이 조금씩 축을 달리 하면서도 거의 일직선을 이루면서 층층이 앉아 있다. 보광명전 동쪽으로는 대장전을 중심으로 진영당·응진전·명부전 등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예천 소백산 용문사 일주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예천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 (醴泉 龍門寺 重修龍門寺記碑)]

이 비는 고려 명종 14년(1184)에 이지명(1127∼1191)이 왕의 명을 받들어 기문을 짓고, 이듬해 성인선사 연의가 비문을 쓰고 입선 해석이 각자한 높이 195㎝, 너비 93㎝, 두께 10㎝ 크기의 중수용문사기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용문사의 위치 소개 및 사원의 형성계기가 된 두운선사의 복정 사실과 태조왕건의 지원 내용, 주지 조응의 용문사 중수 및 낙성 관련 내용, 대선사 조응에 관한 내용 등이다. 그리고 명종 18년(1188)에 추기된 음기는 조응의 제자를 사법제자와 집사제子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비는 12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으며, 내용분석을 통해 고려중기 선종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유형문화재 지정대상으로 선정한다.

출처:문화재청


"소백산 용문사 해운루"


보광명전(전체적으로 경사진 비탈에 선 절이라 계단이 많다. 몇 계단 올라 회전문을 지나면 다시 높다란 석축이 있고 그 위에 강당인 해운루가 앉았다. 이어지는 일직선 상에는 최근에 새로 맞춰 온 듯한 석탑의 푸르뎅뎅한 빛이 어딘지 낯설어서, 새로 정비한 품이 고찰다운 느낌은 주지 못한다. 다시 정비한 높다란 석축 위에 한껏 권위를 세우며 앉아 있는 보광명전은 용문사의 주요 전각이기는 하나, 1984년 용문사에 큰불이 난 뒤 새로 세운 건물이다.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데 금분을 새로 입혀서인지 철불의 강인한 맛은 느끼기 어렵다. 철불 좌우에는 소조석가여래와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명부전(응진전에서 좀더 동북쪽으로 오르면 명부전이 있다.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명부시왕들은 아무리 지옥에서 받을 벌로 위협한다고 해도 고개 숙이게 될 것 같지 않은 편안한 얼굴들이니, 조선 후기 불교가 가졌던 친근성과 민중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진영당, 대장전, 보광명전"


[국보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 (醴泉 龍門寺 大藏殿과 輪藏臺)]

ㅇ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 국난(김보당의 난) 극복을 위해 조응대선사(祖膺大禪師)가 발원하고 조성한 것으로, 고대 건축물로는 매우 드물게 발원자와 건립시기, 건립목적이 분명하게(重修龍門寺記/1185년) 드러나 있다. 대장전은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인데, 용문사 대장전은 윤장대를 보관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경장건축이라는 데서 독특한 가치가 있다.

ㅇ 윤장대는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회전식 경장(經藏)으로 한쌍으로된 윤장대는 동아시아에서도 그 사례가 없고 국내 유일이라는 절대적 희소성과 상징성이 있다.

[영문 설명]

Daejangjeon Hall and Yunjangdae (a rotating sutra case cabinet) were built by a monk named Joeung to pray for the peace of the country during the national crisis caused by GIM Bodang’s rebellion in 1173 (the 3rd year of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of Goryeo). The journal (1185) about the repair of Yongmunsa Temple mentions the person who offered the prayer, the construction date, and the purpose of its construction, which is not usually found. In general, the Daejangjeon Hall of each Buddhist temple was used to store the Buddhist Scriptures, but this one at Yongmunsa was built to keep the Yunjangdae. 

The rotating sutra case cabinet is the only one in the country, while no similar device was found even in neighboring country.

출처:문화재청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먹거리

"한쌍 윤장대를 보관한 국내 유일 경장건축" [국보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 (醴泉 龍門寺 大藏殿과 輪藏臺)] ㅇ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 국난(김보당의 난) 극복을 위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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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전 앞 아귀밥통"


[보물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그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똑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圓刻像)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에 비해 신체의 굴곡이 보다 유기적이고, 표현력도 뛰어나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造成記)가 하단에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숙종(肅宗) 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영문 설명]

Placed before a wooden panel of a group of Buddhist icons carved in high relief in Daejangjeon Hall of Yongmunsa Temple, Yecheon, this wooden Buddhist triad shows Amitabha Budda flanked by two bodhisattvas. The principal Buddha has no usnisa (a protuberance symbolizing supreme wisdom) but features the semilunar “topknot jewel” on the front center of the head, and dignified appearance. The robe is rather thick and draped from both shoulders to cover the entire body except for the neck and the central portion of the breast, while creating folds depicted in a simple and stylized manner. Details show that the Buddha and his attendants were made by the same artist who produced the altarpiece on the wall behind them although the masterly skills used for the depiction of the raised hands suggest that he was more attentive when carving the statues. 

According to a postscript written on the lower part of the principal Buddha, the statues were carved in 1684 when Joseon was under the rule of King Sukjong (1674-1720). They are now generally regarded as a fine example of the Korean Buddhist sculpture in the late 17th century.

출처:문화재청

[보물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醴泉 龍門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여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듯 평담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영문 설명]

Completed and enshrined in Yongmunsa Temple, Yecheon, in 1684, this wooden altarpiece is known as the oldest work of its kind existing today in Korea. The main part features a vertical rectangle but the erected semilunar panels decorated with a motif of clouds with sun rays on either side create a more solemn piece of religious artwork. 

The principal Buddha depicted at the center features the head slightly bent as if to pay attention to all those struggling in the world of suffering, and the hands gently laid upon the knees making a symbolic hand gesture to reveal that he is Amitabha Buddha. The outer robe covering both shoulders is rather thick and has folds expressed with a few simple lines. 

His attendants and guards are arranged to form three tiers exhibiting fine symmetry in which the Four Heavenly Kings stand on the lower tier, two on either side, eight bodhisattvas on the middle and upper tiers, and two disciples kneeling down with praying hands on either side the four bodhisattvas standing in the upper rank. The space between the principal Buddha and the bodhisattvas is decorated with a cloud and sunray motif. There is in front of the altarpiece three wooden statues of Amitabha Buddha and his attendants whose details show that both the triad and the altarpiece were made by the same artist although the statues are generally regarded as superior to the altarpiece in terms of artistic workmanship. 

According to a postscript written on the lower part of the principal Buddha, the statues were carved in 1684 when Joseon was under the rule of King Sukjong (1674-1720). They are now generally regarded as a fine example of the Korean Buddhist sculpture in the late 17th century.

출처:문화재청


"나무로 이어진 샘물"


"보광명전 뒤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예천 용문사 자운루 (醴泉 龍門寺 慈雲樓)]

용문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에 두운이 세운 절이다. 두운이 용문산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자운루 밑 말려지는 시래기"


"성보박물관"


"서거정의 시, 용문유적, 용문사유적"


상량문, 전장기, 용문사 완문(광무 4년(1900) 5월에는 용문사 완문을 발급했다. 조선시대에 관부(官府)나 궁방(宮房) 에서 향교, 서원, 결사, 촌, 개인 등에게 발급한 공문서로, 어떤 사실의 확인, 증명, 허가, 명령 또는 권리나 특권을 인정하는 증서를 완문이라 한다. 완문이 사찰에 발급되는 경우는 사찰 주변에 태실이 봉안되거나 경내에 원당이 들어섰을 때이다. 용문사에는 소헌왕후와 문효세자의 태실이 봉안돼 있고 인빈궁의 원당이었다. 

완문에는 용문사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한 무덤)의 향탄봉산(香炭封山)을 관리하는 사찰로 봉해졌다는 사실과 향탄 봉산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 처리에 관한 지침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궁궐 증축 등에 쓰일 소나무 등 목재를 공급받기 위해 특정한 산림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산(禁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권력자들이 이를 사유화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일반 백성들도 몰래 묘를 쓰거나 도벌하는 일이 잦아져 관리차원에서 사찰 숲을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봉산(封山)으로 지정했다. 

목재의 용도에 따라 선재봉산(배를 만드는 데 사용할 목재 생산), 황장봉산(관을 짜거나 궁궐 건축용 목재), 율목봉산(신주 위패용 목재), 향탄봉산(숯을 생산하기 위한 목재), 송화봉산(송홧가루를 얻기 위한 목재)으로 세분화해 관리했다. 예천 용문사는 남해 용문사, 송광사, 해인사 등과 함께 향탄봉산으로 지정됐다. 용문사 인근 숲은 홍릉에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숯을 만들 목적으로 조정이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벌을 금지한 것이다. - 출처:불교신문)


보물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 (醴泉 龍門寺 靈山會 掛佛幀)축소 영인본(예천용문사영산회괘불탱은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삼존불상 가운데 통견(通肩)의 적색 대의(大衣)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에 이르러 10미터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본존불 하단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였는데 두 상 모두 손 모습과 천의(天衣)의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본존불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신체의 자세 및 벌리고 서 있는 발의 모습, 인물의 크기와 형태, 보관, 지물 등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상단 본존불상의 머리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였으며, 배경으로는 황·적·청·녹색의 색구름대(彩雲帶)를 깔고 감청색의 하늘을 두어 공간감을 부여해주고 있다. 또한 그림 내부 하단 가운데 쪽에 왕실의 안위를 발원하는 내용의 글이 있으며, 테두리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괘불탱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 조성의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함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 출처:문화재청)


[보물 예천 용문사 천불도 (醴泉 龍門寺 千佛圖)]

천불도는 유존 사례가 극히 드물어, 1709년에 화승 도문(道文),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이 제작한 용문사 천불도는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천불도는 석가팔상도와 같은 시기인 1709년 제작된 그림으로 당시 불사와 후원자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존하는 천불도는 선운사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는 1754년 작품이 있을 뿐 매우 희귀하다. 또한 1754년 선운사 천불도가 모두 5폭으로 그려진데 반하여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것으로, 현존 천불도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설 뿐 만 아니라 많지 않은 18세기 초반 불화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후기 천불신앙을 전해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영문 설명]

The extant examples of painting son the theme of Thousand Buddhas are extremely rare. The value of this Painting of Thousand Buddhas in Yongmunsa Temple created in 1709, by four monk painters including Domun, Seoljam, Gyesun, and Haeyeong is, therefore, quite inestimable. Dating from the same year as the painting of the eight great events from the life of Sakyamuni Buddha, this painting is accompanied by complete information on the circumstances of its creation, including the name of the patron who funded it. In the orderly arrangement of Buddhas and well-defined shapes and lines, this work is a great example of early 18th-century Joseon Buddhist paintings, highly informative of the stylistic trends in this period. Aside this work, only another painting of Thousand Buddhas has survived. The latter, dating from 1754, has some of its panels housed in Seonunsa Temple with the rest in the collection of the Dongguk University Museum. While the Thousand Buddha painting of Seonunsa Temple is made up of five panels, this one is in a single large sheet, and predates the former by about a half century. This painting is also of significance as a rare relic of the Thousand Buddha cult in late Joseon.

출처:문화재청


[보물 예천 용문사 팔상탱 (醴泉 龍門寺 八相幀)]

팔상탱화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예천 용문사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탱화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영문 설명]

This is a painting about the life of Shakyamuni Buddha -- from birth to death -- portrayed in eight scenes.

The painting is composed of four cuts, each of which contains two scenes. The first cut is about Shakyamuni Buddha descending from Tushita Paradise to this Saha World and Shakyamuni Buddha being born through the flank of Maya Devi in Lumbini. The second cut concerns the four scenes of human existence (Prince Siddhartha feeling the transience of life after observing the people suffering from agony) and deals with his leaving home despite his parents’ opposition. The third cut contains a scene of Shakyamuni engaging in self-discipline with mountain deities in Snow Mountain and withstanding temptations and threats of devils in the process. The last cut depicts a scene of Shakyamuni giving his first sermon in Sarnath and entering nirvana under the twin sala trees. Overall, the painting displays a relatively simple composition focusing on the main scenes, using chiefly red and greenish-blue colors on yellow soil-colored ground.

This painting follows the images and styles of the early Joseon Period (1392-1910). We can see that it contains characteristics distinguished from those of its kind and which were made after it.

출처:문화재청


"업경대, 목조소통, 전패"


"화장찰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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