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삼강주막

2022. 1. 17. 05:57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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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예천 삼강주막 (醴泉 三江酒幕)]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건물이다. 1900년 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삼강제 시점"


"낙동강과 비룡교"


"강문화전시관"


"삼강교(금천, 내성천, 낙동강 삼강 합수점)"


"회화나무와 제단"


삼강 나루터 유래(나루터는 문경 주흘산맥과 안동 학가산맥, 대구 팔공산맥의 끝자락이 만나며,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는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예로부터 서울로 장사하러 가는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 그리고 선비나 장꾼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 가던 길목으로, 나루터 주변은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 배를 통한 농산물의 집산지였고, 대구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도로였기에 1960년대까지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강을 이어주는 나룻배 두 척이 오갔었는데 큰 배는 소와 각종물류를 수송하는 수단으로, 작은 배는 15명의 사람을 태우는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으나, 인근 교량 설치로 인하여 1980년경 나룻배 운행이 중단되었다, 2013년 청소년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나룻배를 재현했다.

황포돛배는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내륙교통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황포라는 명칭은 돛의 색깔이 누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돛의 재료인 광목에 황톳물을 들여 좀을 방지하고 비바람을 맞아도 변하거나 썩지 않게 하였다. 황포돛배는 내륙지방의 물류와 문화의 교류의 중요한 수단 이었다.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한강을 항해하던 황포돛배 수는 하루 평균 100척 이었고, 배 한 척에 대략 30가마니의 쌀이나 소금을 실었다고 한다. 한양의 객주에서 구입한 물품을 황포돛배에 실어 지방에 가져다 팔고, 다시 그곳에서 쌀, 소금, 나무생선 등을 싣고 와 한양의 포구나 객주에 팔았다. 이를 통해 수도 한양과 지방의 물자와 인구의 이동과 문화 교류가 이뤄졌고 강을 따라 나루터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황포돛배는 우리나라 강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삼강주막과 화장실"


삼강주막 뒤 들돌(일반적으로 마을 청년이 들돌을 들어 농부(어른)로 인정받는 의례에서 시작되었다. 나루와 주막이 번성하며 물류 이동이 많아져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이 정해지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삼강주막 뒤 수령 450년 보호수 회화나무"


삼강주막(낙동강 700리에 마지막 남은 주막인 삼강주막은 1900년경에 지어진 주막으로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가져 건축역사 자료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134호)로서 희소가치가 크다. 또, 주막의 부엌에는 글자를 모르는 주모 할머니가 막걸리 주전자의 숫자를 벽면에 칼끝으로 금을 그어 표시한 외상 장부가 눈에 띈다. - 출처:예천군청)


복원 후 삼강주막(유옥연 할머님이 19살 주막을 인수하여 2005년 10월 작고 할때 까지 주모의 이름으로 지켜온 낙동강 1300리 마지막 남은 주막이었다.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방치되다가 2007년 예천군에서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주막 터 뒤 수령 450년 보호수 회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옛 정취를 풍기고 있다.)

보호수 회화나무와 삼강주막 옛모습(좌측, 출처: 금강일보 사진), 복원 후 삼강주막(사진 우측)


삼강주막 외상주막(부지깽이 사용 짧은줄은 대포 한잔, 긴줄은 대포 한 주전자, 외상값을 갚으면 가로로 길게 줄을 그어 외상을 지웠다. 뱃사공, 일반인, 보부상등 따로 외상장부를 두웠다.)


"뱃사공, 일반인, 유옥연할머니 외상장부"


보부상·사공숙소(원래 이곳에는 1900년대에 지은 보부상숙소와 사공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 이동이 아주 활발하였다. 언제나 보부상과 길손들이 이어졌고,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했다. 밤이 되면 낯모르는 사람들이 호롱불에 둘러앉아 야담을 나누면서 잠을 청하던 곳이 보부상숙소이며,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은 길손을 위해 기꺼이 노를 잡았던 사공이 기거하던 곳이다. 당시 건물은 1934년(갑술년) 대홍수로 모두 멸실되었으나,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2008년 복원하였다.) 


"삼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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