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강경 미내다리

2022. 1. 30. 07:24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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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강경미내다리<미내교> (江景미내다리<渼奈橋>)]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미내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이 강을 ‘미내(渼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여 ‘미내다리’라고 부른다.

긴돌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모양를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다리의 강둑쪽 중간쯤에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눈은 마치 장승의 눈과 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모양과 갈기가 있다.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비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7년(1731) 주민의 필요에 따라 강경촌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하여 이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수로정비에 따라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제방 제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8년 완전해체하여 2003년 보수정비 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강경천과 강경대교"


"논산.천안 고속도로, 호남선, 마을 길"


"강경 미내다리와 KTX, SRT 호남선"


논산 3대 명물 강경 미내다리(논산 사람들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논산의 세 명물을 보고 왔느냐고 묻는데 개태사의 가마솥,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를 일겉는다.)


강경 미내다리(이 교량은 조선 영조 7년(1731)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전한다. 일명 조암교(潮岩橋)로도 불리웠다는 미내교(渼奈橋)는 하천명이 미내천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당시 이 다리가 있는 곳은 큰 시내로서 바닷물과 서로 통하였다 하였으니 조수가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교량이 놓여지기 이전에는 여름 장마철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되어 안타깝게 여긴 강경촌인 석설산(石雪山) 송만운(宋萬雲)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柳富業)과 승(僧) 경원(敬元), 설우(雪遇), 청원(淸元)과 여산의 강명달(姜明達), 강지평(姜之平)이 1년 미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한다. 당시 교량은 평교로 되었으나 석재만을 사용된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수학적 계산과 역학적 구성 및 예술적 토목 건축술의 종합적 공법으로 이룩된 것이다. 세 개의 아치형 교량중 가운데가 크고 남북 쪽이 약간 작다. 받침은 긴 장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虹?石)을 돌려 만들었으며 석재는 40㎝×50㎝×110㎝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가운데 홍예 정상부인 종석은 다리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호랑이 머리를 깊게 선각(線刻)했으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북쪽 홍예는 용머리를 새겼고 난간석에는 화문을 새긴 듯 하나 마멸되었으며 남쪽 홍예 정부는 조각이 없다.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드러난 면이 35㎝×150㎝ 정도의 장대석을 잘 치석하여 반월형의 둘레에 따라 개개의 돌을 사다리꼴로 다듬은 솜씨는 수학적 계산과 정확성을 나타낸 것으로 교각 지반을 쌓아 놓은 것과 부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제형(梯形)의 돌을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한 구성은 당시 과학발달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潮岩橋)"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곳 자연석 위에 "은진미내교비(恩津渼奈橋碑)"가 있었으나 파손되어 있던 것을 근래 부여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출처:논산시청)


"강경 미내다리와 강경 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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