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2022. 3. 31. 05:05바롱이의 쪽지/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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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統營 閑山島 李忠武公 遺蹟)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on Hansando Island, Tongyeong]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산대첩은 매우 불리하였던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해전으로 육지에서의 행주성대첩·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유명한 싸움이었다.

선조 25년(1592) 이곳에 제승당(制勝堂)을 짓고, 26년(1593)부터 30년(1597)까지, 해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곳 군영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제승당과 함께 ‘제승당유허비’를 세운 후 여러 차례 공사가 이루어졌고, 일제시대 때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을 보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비와 함께 거북등대가 있다.

[영문 설명]

Built in memory of the Hansan Battle wherein Admiral Yi Sun-sin scored a spectacular triumph over the Japanese Nav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t was regarded as a symbol of patriotism and national defense. Hansan Battle, one of the three great battles along with Haengju Battle and Jinju Battle, was a memorable battle on the sea, with the Japanese fleet defeated under severely disadvantageous conditions. Jeseungdang Shrine was built here in the 2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1592). It used to be the center of a navy camp that commanded the sea from 1593 to 1597. Including Jeseungdang, the military camp was burnt down and destroyed in the 30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1597). It had been restored numerous times afterwards. The local villagers finally reconstructed it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Originally, Jeseungdang was built at the site of Unjudang where Admiral Yi planned a strategy with his soldiers and was named as such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On this site were Hansanjeong Archery Ground, Suru Watchtower, and Chungmusa Shrine, which preserved a portrait of Admiral Yi, as well as Jeseungdang. On top of a mountain were the Stele for the Victory at Hansan Battle and a turtle lighthouse.

출처:문화재청

제승당 전경


통영항발 한산도 제승당행 여객선을 승선한다.


"여객선에서 바라본 통영 전경"


한산도 앞 거북 등대(선착장에서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을 찾아가는 데는 배로 약 15분 정도 걸린다. 한산도 해역은 맑고 잔잔한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를 누비는 뱃길이 아름다운 해상 관광지로 유명하다. 한산도에 닿을 무렵 바다의 암초 위에 거북선 모형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등대를 세운 거북등대가 보인다. 거북등대 뒤 산봉우리에 한산대첩비도 눈에 뛴다.)


"사적 한산도이충무공유적지 표석"


"소나무 군락지"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 월명야 상수루 무대도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심수시 하처 알성강적 갱첨수 (深愁時 何處 一聲羌笛 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수국추광모 경한안진고 (水國秋光暮 驚寒雁陳高)
우심전전야 잔월조궁도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 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다

시비와 제승당 앞바다 전경


우물(이 우물은 1593년 당시 이순신이 한산도 통제영안에 운주당을 창건하고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이다. 바다에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는 수질검사결과 음용수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제승당]

유적지의 중심건물인 제승당은 충무공이 여수에 있던 본진을 이곳으로 옮겨와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면서 세운 것으로 선조 26년(1593) 7월부터 선조 30년(1597) 2월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다.

1597년 7월 26일 충무공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이곳을 떠난 후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싸움에서 패하자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배결이 제승당에 비축해 두었던 쌀과 무기를 왜적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후 영조 15년(1739)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와 함께 다시 중건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6년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제승당도 새로 지었다. 현재 제승당 안에는 ‘노량해전도’ ‘진중생활도’ ‘한산대첩도’ ‘우국충정도’ ‘사천해전도’ 등 이충무공 기록화와 거북선 1/25 모형,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승당 안에는 명조하사품, 노량해전도, 진중생활도, 한산도대첩도, 애국충정도, 사찬해전도, 제승당 현판(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현판) 등이 전시돼 있다.


수루와 이순신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이순신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는 이순신의 후손으로 삼도수군통제사나 부사** 의 벼슬을 지낸 이들 중 어진 정치로 칭송을 받은 6명의 비석이다.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공덕비를 이곳에 모아 놓았다.

오른쪽부터 이태상, 이한창, 이태권, 이승권, 이규석, 이규안 의 공덕비가 늘어서 있다. 대부분의 비석에 ‘무홀도민 천추불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공덕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 삼도수군통제사: 조선시대에 삼남 지방(전라·경상·충청)의 수군을 지휘, 통솔한 수군 총사령관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실질적으로는 경상우수영, 전라우수영, 충청수영까지 지휘,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균과의 갈등이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선조 26년(1593) 7월에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여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와 전라좌수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고종 32년(1895)까지 유지되었고, 303년 동안 208명의 통제사가 임명되었다.

** 부사: 조선시대의 지방 장관직으로 정3품에 해당한다.

*** 이태상(5대손, 121대 통제사), 이한창( 6대손, 138대 통제사), 이태권(8대손, 부사), 이승권(8대손, 172대 통제사), 이규석(10대손, 198대 통제사), 이규안(10대손, 203대 통제사)) 


[수루]

이 수루는 임진왜란때 이순신이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망루였다. 수루에서 남해안의 왜적의 동태를 파악한 후에 이를 봉화, 연, 고동 소리 등을 이용하여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등 주변 지역으로 알렸다. 이순신은 수루에 올라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구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나랏일을 걱정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1976년의 제승당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현재의 위치에 수루를 새로 지었다. 이후 옛 문헌의 내용에 근거하여 2014년에 전체를 나무로 고쳐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에서 바라본 전경"


[한산정]

한산정은 이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 정도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충무공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활터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내기에 진 편에서 떡과 막걸리를 내어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러한 기록에서 활쏘기 훈련에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자 한 이충무공의 지혜를 볼 수 있다. 한산정에서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병사들은 대부분 경상, 전라,. 충청 출신으로 선조 27년(1594)에 이충무공의 건의로 무과 특별시험에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한산정에서 바라본 활터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활터로는 유일한 곳이다. 선조 27년에는 이곳에서 특별 무과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홍살문과 외삼문"


[한글비]

한글비는 1948년에 팔일오광복을 기 념하기 위해 경상남도 초·중등학교의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비문은 이순신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서 그 정신을 이어 받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승당 유허비]

제승당 유허비는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작전지휘본부로 사용한 운주당이 있던 곳이다. 운주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제승당은 1739년 통제사 조경이 다시 지은 것이다.

3개의 비석 중 왼쪽 비석은 1739년에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세운 것이다. 오른쪽 비석은 그곳이 전에 있던 비석을 묻은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이 비석은 이순신의 후손이자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세웠다. 가운데 비석은 오른쪽 비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중건하면서 세운 유허비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충무공의 위엄과 기개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어허, 여기는 고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터이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때, 천지 귀신이 그 정성을 굽어보고 풍운뇌우도 도와 왜병이 바다를 덮고 날뛰면서도 이 집 울타리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 못했던 일은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충무사]

충무사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매년 봄가을에는 통영시민들이 제승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또 한산대첩 기념일인 8월 14일(양력)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해군사관생도들이 참배한다. 통영시는 한산대첩제를 성대히 거행하여 이순신의 정신을 기리며 이어가고 있다. 사당에는 국보 제76호인 서간첩의 일부와 이순신이 중국 송나라 역사를 읽고 썼던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이순신 영정은 1978년에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충무사 충무공 이순신장군 영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덕수 이씨로 1 545년 3월 8일 새벽에 한성 건천동에서 부친 이정과 모친 초계 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76년 32세에 과거시험의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을 시작으로 무관직을수행하여 훈련원봉사, 발포수군만호, 조산보만호, 훈련원참군 등을 거쳤다. 1589년 45세에는 정읍 현감을 지냈고, 1591년에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48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월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여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니 이순신의 나이가 54세였다. 전란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했던 우리 민족사의 영웅 이순신의 3대 정신은 아래와 같다.

나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멸사봉공의 정신
거북선과 조총을 새로이 만든 창의개척의 정신
미리 전쟁에 대비해 적을 물리쳤던 유비무환의 정신

이순신의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다. 이순신이 죽자 인조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조가 다시 영의정으로 올려 모셨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부인은 상주 방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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