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천년 고찰, 강원 고성 건봉사

2022. 7. 16. 04:10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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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천년 고찰"

[고성8경 제1경, 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전국 4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신라 법흥왕(서기520년)때 지어진 오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에 의한 승병 봉기처이기도 했던 호국사적지로서 '의승병기념관'이 있다. 융성기에는 3,183칸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 6.25전쟁때 거의 소실되었으며, 최근 건봉사지와 사찰의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특히 건봉사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와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 (보물 제1336호), 그 양쪽에 바라밀 문양의 돌기둥, 불이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이 옛 건봉사터(강원도 기념물 제51호)에 천년이 넘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출처:고성군청

좌측 사진 2019년 건봉사/우측 사진 1929년 촬영 건봉사(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명대사 동상"


"불이문과 보호수 수령 500년 풍게나무"

자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식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팽나무’라는 명찰을 달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건봉사불이문 (乾鳳寺不二門)]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건봉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건봉사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것이다.

불이문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금강저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앞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불이문의 주변에는 ‘나무아미타불석주’, ‘능파교비’등을 세웠다.

출처:문화재청


[불이문]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인 불이문(不二門)은 문이 아니라 차라리 집에 가깝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이 현판을 썼다. 금강저(무기의 일종)가 기둥에 새겨져 있는데, 한국전쟁 때 맞은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형 돌확"


[돌솟대]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두툼한 돌기둥이 나타난다. 다소 부피가 커지고 나무가 아닌 돌이긴 하지만 장대 위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는 외형은 완전한 솟대인데, 돌기둥에 ‘나무아미타불’,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불경이 한글로 쓰여 있는 것이 독특하다. ‘불기 2955년 무진(戊辰) 여름’이라는 명문도 뚜렷하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를 염원하며 마을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하던 솟대 신앙이 불교에 습합되어 나타난 변형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높이는 약 3m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고성 건봉사 능파교 (高城 乾鳳寺 凌波橋) Neungpagyo Bridge of Geonbongsa Temple, Goseong]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This is an arch bridge linking the Main Hall area and Amitabha Buddha Hall of Geonbongsa Temple, Goseong (width: 3m; length: 14.3m; height of the center: 5.4m).

According to the relevant records, Geonbongsa Temple was founded and christened Wongaksa by Monk Ado in 520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Beopheung of Silla). It was renovated by State Preceptor Doseon toward the end of Silla (57 BC- 935 AD) and renamed Seobongsa in association with the existence of a phoenix-shaped stone in the western section of the temple.

It was renovated again in 1358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ngmin of Goryeo) by Monk Naong and renamed Geonbongsa. The arch at the center has diameter of 7.8m and height of 4.5m.

The stone monument within the temple set up in 1708 (the 34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to commemorate the construction of the bridge tells us that the bridge was first built between 1704 (the 3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and 1707. The bridge was renovated in 1749 (the 25th year of King Yeongjo’s reign) after it collapsed due to flood, only to collapse again in 1880 (the 17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The stones of the collapsed bridge were used to repair the stone stairs of the Main Hall and Sanyeongru Pavilion.

The bridge has maintained its original shape relatively well, and there is a stone monument containing information on when it was first built and who built it.

출처:문화재청


[십바라밀]

능파교를 건너면 새로 지은 대웅전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능파교를 건너자마자 십바라밀이 새겨진 돌기둥이 서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의 수행을 가리킨다. 능파교 좌우의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각각 5개씩 새겨져 있다.


"금강산 건봉사 현판과 대웅전"


"보제루"


"건봉사 젼경"


"대웅전 앞 개"


[원불이 진또배기]

천 년 전, 만일 동안 염불 정진한 서른 한 명의 스님이 승천했다는 등공대 초입에 이 작품을 세운다. 조각난 철판을 이어 붙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서 합장한 손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오래 전부터 하늘과 땅이 맞닿는 희망을 표현한 솟대(진또배기)를 세웠다. 남과 북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새는 평화롭게 한 곳을 바라본다.

2017년 문화재청이 시행하는 전통산사 문화재 활용사업으로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에서 추진한 금강산 불이문화재활용사업의 상징물로 남북 분단 72년이 되는 2017년 가을, 자연설치 미술작가 박영필이 만들다.


[장군샘]

냉천리라는 지명에 유래를 두고 있고, 장군샘터, 장군수로 불리기도 하였다. 옛스님들 말씀과 전설에 의하면 이 곳 약수는 무색 무미 무취의 광천약수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을 위해 의승병을 일으킨 사명 대사께서 전국의 승려들을 건봉사에서 훈련시키면서 이 물로 몸을 씻게 하고 음용토록하여 각종 질병을 퇴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적멸보궁과 십바라밀"


"나무 밑에 쉬시는 부부"

남편분은 거동이 불편 하셔서 바라 보기만 한다며, 왕소나무 꼭 안아 보고 소원 빌라고 아내분이 말씀하신다.


[강원도 기념물 고성건봉사지 (高城乾鳳寺址)]

건봉사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법흥왕 7년(520) 때 아도화상이 지은 절이다. 처음에는 ‘원각사’라고 불렀으나, 이 절의 서쪽에 새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 건(乾)과 봉(鳳)을 합쳐 ‘건봉사’로 바뀌게 되었다.

경덕왕 17년(758)에 발징화상이 고쳐 지었고,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다시 고쳤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6,000여 명이 모여서 왜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불타 지금은 옛 절터만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 5과, 진신치아사리]

신라시대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唐)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치아(齒牙)사리(舍利)를 통도사(通度寺), 월정사(月情寺)에 봉안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병이 통도사의 사리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선조 38년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일본에 사행(使行)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 건봉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세계에서 15과뿐이며, 이중 3과가 스리랑카에 있고 나머지 12과가 건봉사에 있었는데, 86년에 도굴되었다가 8과만을 되찾아 그 중 3과를 사리탑에 모시고, 5과는 일반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금제사리함을 별도로 만들어 안치하여 놓은 것이다.

출처:고성군청

석가여래영아탑봉안비, 석가여래치상입탑비, 석가여래치상입탑


[건봉사 왕소나무]

1500여년의 고찰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써 그 규모나 세가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번성기때는 3,183 칸의 전각이 있었던 건본사의 웅대한 규모도 1500년의 세월동안 산불과 전란등으로 인해 여러번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하였다.

산내의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는 과정에서 산천초목들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수십그루의 아름 들이 소나무들이 재로 변하기를 수십번 그런데, 극락전 지역의 왼쪽 산등성이에 용케 화마를 피해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전각과 가까이에 위치해있어 불길을 피해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물길을 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건봉사의 번성과 아픔을 이야기하듯 300여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성 건봉사 왕소나무"


"왕소나무에서 바라본 건봉사"


"왕소나무와 여불자님"

일행분 3명과 여행 오셨으며 사진 찍어 드린 연으로 식사 공양 후 속초 시내까지 자가용을 태워 주셨다.


"왕소나무 가지, 수피, 혹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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